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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

인천의 고인돌

by 형과니 2023. 4. 25.

인천의 고인돌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15 08:09:19

 

인천의 고인돌

이희인(인천광역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삼거리고인돌

 

# 고인돌과 인천

 

인천에는 미추홀(彌鄒忽)라는 이름으로 역사상에 인천이 처음 등장하기 이전부터 이 땅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선사인(先史人)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고인돌을 꼽을 수 있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무덤이다. 지상에 큰 덮개돌이 드러나 있고 그 밑에 고임돌(支石), 무덤방(墓室)이 위치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고인돌이라는 명칭은 덮개돌 아래에 돌을 괴는 형태에서 비롯된 것으로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한다. 고인돌은 대부분 무덤으로 사용되었지만 일부는 집단의 의식을 행하는 제단(祭壇)이나 기념물로 사용된 것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인돌은 유럽·인도·동남아시아·일본 큐슈·중국 동북지역 등 전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4만여 기가 확인되어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고인돌이 분포하는 지역이다. 부장유물로는 간돌칼(磨製石劍), 돌화살촉(石鏃), 청동기(靑銅器), 토기류 등이 있으며 고인돌 주변에서는 의례용으로 묻은 것으로 보이는 돌화살촉, 홈자귀(有溝石斧), 숫돌(砥石) 등의 석기와 토기파편이 발견되기도 한다.

 

 

오상리고인돌군

 

고인돌에는 하나의 무덤방에 한 사람만 묻은 것이 보통이다. 시신의 매장방법은 펴묻기(伸展葬)가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이밖에 화장(火葬), 옆으로 묻기(側葬), 세골장(洗骨葬) 등도 확인되고 있다.

 

고인돌을 축조하는 것은 운반과 채석과정에서 많게는 수백 명이 필요한 어려운 작업으로, 당시로서는 대규모 토목사업에 해당한다. 따라서 고인돌 축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많은 수의 인원을 동원할 정도의 집단이 존재를 알려주는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인천에는 이와 같은 고인돌이 강화도를 비롯해 인천 전역에 250여 기가 분포하고 있다. 이는 한반도 중부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밀집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인천지역 청동기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강화도 고인돌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인천의 청동기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 강화도의 고인돌

 

 

부근리고인돌(사적 137)

 

지금까지 조사된 바에 따르면 강화도에는 16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한다. 강화 고인돌의 구조는 탁자식(卓子式)과 개석식(蓋石式)이 대부분이며 그 중 북방식의 비율이 높다.

 

한국의 고인돌은 형태적 특징으로 크게 북방식(北方式), 기반식(基盤式), 개석식(蓋石式)등으로 구분된다. 탁자식은 판돌로 짜맞춘 무덤방을 지상에 축조하고 그 위에 돌을 얹어 놓은 형태로 북방식이라고도 불리운다. 기반식은 무덤방을 지하에 만들고 그 주위에 고임돌을 4매에서 8매 정도를 놓고 그 위에 덮개를 씌우는 형태로 남방식이라고도 하며, 개석식은 고임돌 없이 지하에 만든 무덤방 위에 덮개돌을 덮은 형태를 말한다.

 

고인돌의 대부분은 고려산과 별립산을 중심으로 강화 북부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고려산 일대의 삼거리·고천리·부근리·망월리·오상리, 별립산 일대의 교산리 등에 6개의 군집(群集)을 이룬다. 이들 고인돌군은 산마루나 곡간대지에 위치하며 수십 기의 고인돌이 떼를 이루어 분포한다. 이와 같이 강화도 북부를 중심으로 대규모 고인돌군이 분포하는 것은 청동기시대 강화도에 일정 규모의 세력집단이 형성되었던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여겨지고 있다.

 

한편 강화 고인돌을 이야기 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부근리 고인돌이다. 이 고인돌은 전형적인 북방식이며 남한 지역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덮개돌은 길이 6.5m, 너비 5.2m 두께 1.2m이며 무게가 52t이 넘는다.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고임돌도 길이 5m 너비 1.5m이고 무게도 왼쪽 고임돌의 경우 13t에 달한다. 이와 같이 부근리 고인돌은 거대한 크기와 무게가 주변의 고인돌과 현저하게 비교되고 있어 강화도에서 고인돌을 축조했던 집단을 통합한 유력자의 무덤인 동시에 공동체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기념물의 역할도 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대곡동고인돌

 

# 인천내륙과 도서지역의 고인돌

 

최근까지 인천 내륙지역의 고인돌은 그 숫자나 밀집도가 강화도에 비해 높지 않았기 때문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서구 대곡동 고인돌군을 비롯해 내륙지역에도 강화도와 비교할 만한 고인돌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인천 내륙의 고인돌은 서구 대곡동 가현산과 남구 문학산 일대를 중심으로 분포한다. 그 중 서구 대곡동 고인돌군은 지금까지 조사결과 70여 기가 확인되어 내륙지역에서는 가장 많은 고인돌이 밀집하고 있다. 문학산 일대의 고인돌은 도시화의 진행으로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학익동에 7~8, 주안동 3, 문학동에 1기 등 모두 12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 학익동 고인돌 2기가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에 이전, 복원되어 있다. 이밖에 무리를 이루지는 않지만 영종도와 백아도에서 각 1, 덕적도에는 3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어 도서지역을 포함한 인천 전역에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륙과 도서지역에서도 고인돌이 다수 분포하는 것은 이 지역에서도 강화도와 같이 지역을 배경으로 해 고인돌을 축조할 만한 세력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청동기시대의 역사적 전통은 이후 미추홀로 대표되는 새로운 역사의 전개에 밑바탕이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원당유적집자리

 

인천에는 고인돌과 함께 청동기시대 인천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유적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서구 원당동과 계양구 동양동에서 수십 기의 집자리가 발굴되었고 문학동에는 도랑()유구가 조사되었다. 이밖에 문학산, 수봉산 등 현재의 도심지역에서도 민무늬토기와 간돌칼, 간돌도끼, 반달돌칼 등 다양한 형태의 간석기가 발견되고 있어, 인천 전역이 청동기인들의 생활의 터전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자료제공 =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다음 주는 <인천역사산책> 기획시리즈(6) “비류백제와 능허대가 게재될 예정입니다. - 편집자 주)

 

 ※ 글쓴이 프로필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인하대학교박물관 특별연구원

 ▶인천광역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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