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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

인천의 호족과 ‘7대어향’

by 형과니 2023. 4. 25.

인천의 호족과 ‘7대어향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16 11:10:40

 

인천의 호족과 ‘7대어향

강옥엽(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 신라말 호족세력의 대두

 

 삼국을 통일했던 신라는 하대로 오면서 점차 정치·경제는 물론 사회·사상적인 면에서 여러가지 변동을 경험하게 된다. 정치적으로는 골품(骨品)보다는 실력과 무장력으로 왕위를 쟁취하는 이른바 왕위계승전쟁이 이어졌으며, 골품제 하에서 최고의 지식인으로 행정의 실무를 담당했던 6두품들도 기존체제에 반발하면서 고대적인 이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중세로의 지표를 제시했다. “계림황엽 곡령청송(鷄林黃葉鵠嶺靑松)”이라 해 이미 신라의 멸망을 예언한 최치원(崔致遠), 고려 왕조 개창에 조력했던 최언위(崔彦僞), 후백제 견훤의 참모가 되었던 최승우(崔承祐) 등의 활동이 그것이다.

 

 그런 가운데 각 지방에는 호족세력(豪族勢力)이 등장하면서 경주 중심체제에서 벗어나 지방이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고, 지역인물이 역사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하게 되는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변혁의 시기에 각 지역과 출신가문(家門)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면서 성립된 것이 본관(本貫)이다. 본관제도는 호족에게서 비롯된 것으로서, 이들 호족들은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중앙에 진출해 귀족(貴族)으로 활동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 인천지역의 호족

 

 나말여초(羅末麗初)의 호족세력(豪族勢力)은 인천지역에서도 대두했는데, 그 중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인주 이 씨(仁州李氏), 부평 이 씨(富平李氏) 그리고 강화 위 씨(江華韋氏)의 경우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인주 이 씨의 선조에 대해 명확한 내용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 선조가 신라의 대관(大官)이라는 점, 사신으로 입당(入唐)했다는 점, ()의 천자가 이를 가상히 여겨 이 씨를 사성(賜姓)했다는 것은 이씨가록(李氏家錄)과 일치를 보이고 있다.

 

 

 인주 이 씨는 이허겸의 손자인 이자연(李子淵) 때에 세 딸이 모두 문종비가 되면서 왕실의 외척으로 등장하게 되어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80여 년 동안 중앙정치계에서 핵심세력이 되었다. 더구나 왕실과의 혼인관계뿐만 아니라 당시의 세력가()들과도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벌족세력을 형성해 고려후기까지 그 세력을 유지했다.

 

 인주 이 씨 이외에도 인천지역의 호족세력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부평 이 씨다. 부평이씨대동보(富平李氏大同譜)에 따르면 부평 이 씨의 시조는 이희목(李希穆)으로 고려 태조의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책봉되었는데, 이는 고려왕조의 집권력 확립을 위한 조치이기도 하면서 나말여초 호족세력의 지역적 기반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신라는 통일 후 활발한 해상무역활동을 국가적으로 보호할 필요성에서 청해진(완도당성진(남양혈구진(강화) 등에 해상군진을 설치했다. 이러한 군진세력과 서해의 해상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것이 강화·교동·통진지역의 호족이고 그 대표적인 것이 강화 위 씨다. 고려사에 강화현인으로 나타나 있는 위수여(韋壽餘)는 중앙으로 진출해 문하시중에까지 올라 그에 관한 기록이 남았지만, 그 외의 호족들은 그 성씨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 구체적인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 고려시대 지방제도와 인천

 

 

 

고려의 지방제도는 호족세력에 대한 통제책과 중앙정부의 행정력 침투과정과 함께 정비되어 갔다. 태조대는 후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은 물론이고 통일한 이후에도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했다. 그것은 호족들이 지방행정은 물론 지방 농민들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지방관이 처음으로 파견되는 것은 6대 성종대 일이다. 성종대에는 3()·6() 등 정치제도의 기반이 확립되었을 뿐 아니라 지방관이 파견되어 호족세력의 지배 하에 놓여있던 지방의 행정력과 군사력이 중앙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현종대에 이르러 지방관제는 대폭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현종 9(1018)에 각 도의 안무사를 파하고 전국에 4도호(都護)·8()56지주군사(知州郡事)·28진장(鎭將)·20현령(縣令)을 설치했다. 이로써 고려의 지방제도는 4도호부·8목을 중심으로 그 밑에 중앙정부에서 지방관을 파견해 상주시키는 56개 주와 군, 28개의 진, 그리고 20개의 현으로 편성되었다.

 

 이러한 지방제도의 정비과정에 인천지역도 몇 차례 변화를 겪게 되었지만 그 의미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고려사지리지에 따르면 인천(인주)은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買召忽縣)으로 통일신라시대인 경덕왕 16(757)에 소성현이 되어 율진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현종 9(1018)에는 다시 수주에 속했다. 그러다가 숙종조(1096~1105)에 이르러서 경원군으로 승격되어 지군사가 설치되었다. 이것은 숙종의 모후인 인예태후 이씨의 내향이기 때문이었다. 이어 인천은 다시 인종조(1123~1146)에 인주로 가호(加號)되었는데 이는 인천이 인종의 모후인 순덕왕후 이 씨의 내향이었기 때문이었다.

 

# 왕실의 고향, 7대어향(7代御鄕)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80년 동안 인주 이 씨는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했는데, 당시 고려 왕실의 왕자·궁주 가운데 인주 이 씨 외손 또는 생질이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왕실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인주 이 씨는 외척으로서의 권세와 벌족으로서의 지위를 굳혔을 뿐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해주 최 씨·경주 김 씨·평산 박 씨·파평 윤 씨·강릉 김 씨 등 거족들과도 혼인관계를 맺어 일대 벌족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헌종 대에 조카 한산후(漢山侯)를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던 이자의(李 資義)의 난과 인종 4(1126)에 왕권을 차지하려 했던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자 인주 이 씨는 타격을 받았다. 당시 이자겸의 딸인 두 인종비는 모두 폐비가 되었다. 인종은 새로이 중서령 임원후(中書令 任元厚)의 딸을 맞이해 왕비로 삼았는데, 공예태후(恭睿太后) 임 씨다. 공예태후는 부평 이 씨인 문하시중 이위(李瑋)의 외손녀다. 공예태후는 의종·명종·신종 등 3왕과 2왕자·4궁주를 낳았다. 인주 이 씨가 몰락한 후에는 김부식(金富軾김부의(金富儀) 등의 경주 김 씨가 귀족사회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그 권세는 인주 이 씨에 미치지 못했다.

 

 

 고려 말에 이르러 공양왕은 그의 조상을 높혀 4()에게 작시(爵諡)를 추가하고(1390), 인주를 올려 경원부로 삼았다. 그런데 그 사유를 동국여지승람(國輿地勝覽)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에는 '칠대어향(七代御鄕)',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칠대지향(七代之鄕)', 강희맹(姜希孟)승호기(陞號記)에는 '칠대향(七代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양왕은 고려 말, 무너져가는 고려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방편으로 그의 7대조인 신종의 선대 7대왕 중 5대왕이 인천을 외향으로 하고 5대 왕비가 인천을 내향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조상을 높이고 알리려는 뜻에서 인주를 부()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읍호를 환원시켰던 것이다. 인천은 순종·선종·헌종·숙종·인종 5대 왕의 외향이 되고 문종·순종·선종·예종·인종 5대 왕비의 내향이 된다. 따라서 이 7대 동안 인천은 왕의 외가이거나 왕비의 친정이 되고 특히 순종·선종·인종 3대는 왕의 외향인 동시에 왕비의 내향이 되는 것이다. ()자는 엄밀하게 왕에게만 사용되는 글자로서 어향이라고 할 때 '왕의 고향'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 뜻을 확대해 7대 동안 인천이 왕실과 관련이 있다고 해칠대어향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 자료제공 :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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