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천의 역사

해상교통과 자연도의 경원정

by 형과니 2023. 4. 25.

해상교통과 자연도의 경원정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16 11:12:48

 

해상교통과 자연도의 경원정

배성수(인천광역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 해상교통의 요충지 인천

 

 

 황해에서 한반도 중부지방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인천 연안은 해안선의 굴곡이 심한 데다 크고 작은 부속도서들이 파도의 흐름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해 항구로서 양호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예성강, 임진강, 한강의 물줄기가 한데 모여 바다로 나아가는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에 인천 연안을 통해야만 한반도 중부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내륙 수운의 입지조건도 매우 뛰어난 지역이었다. 이와 같이 인천은 연안 해운과 내륙 수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삼국시대 중국과의 교통은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고, 해로(海路)의 장악여부에 따라 각 나라의 정치·군사적 사활이 결려 있었기 때문에 한강 하구 및 인천연안을 둘러싼 삼국간의 쟁패는 격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중국대륙과 연접해 있는 고구려나 해상을 통해 중국과 교통할 수 있었던 백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선진문물의 수입이 늦을 수밖에 없었던 신라가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진흥왕 14(553) 이 지역을 차지해 황해 항로를 확보했던 것에서 기인한다.

 

 

#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의 해상교통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걸쳐 중국으로 향하는 뱃길로 세 개의 해상항로가 이용되었다. 황해북부 연안항로(西海北部 沿岸航路)와 황해중부 횡단항로(西海中部 橫斷航路), 황해남부 사단항로(西海南部 斜斷航路)가 그것으로 이 중 인천연안을 이용하는 항로가 북부 연안항로와 중부 횡단항로인데 출발지는 당은포(唐恩浦), 당의 기착지는 산동(山東)반도의 등주(登州)였다.

 

 북부 연안항로는 한반도의 서북쪽 연안과 중국의 동북 연안을 따라 반원모양을 그리며 항해하므로 난파나 조난의 위험이 없는 비교적 안전한 항로이기 때문에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해상교통로로 일찍부터 사용되었다. '삼국지(三國志)' 등의 중국 역사서에는 아직 삼국이 정립되기 이전인 3세기경부터 낙랑(樂浪)과 삼한, ()사이에 연안항로를 통한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우리나라의 대표적 지리지 중 하나인 '여지도서'에는 삼국시대 백제의 사신들이 지금의 인천 땅에 있는 대진(大津)을 출발해 바다 건너 중국의 등주(登州)와 내주(萊州)로 향했다는 기록이 있어 백제-중국간의

교류에도 이 항로가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백제가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수도를 웅진으로 천도한 이래 신라가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출발지점을 경주에서 가까운 당은포(唐恩浦)로 옮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북부 연안항로는 한반도의 정세변화에 따라 항로의 이용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단점을 갖는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고구려(高句麗) 또는 발해(渤海)의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양국간의 정치상황이 악화되었을 때에는 이 항로를 이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영역을 거치지 않는 새로운 항로의 필요성이 절실해졌고, 이러한 이유에서 6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된 항로가 중국의 산동반도와 황해도 옹진반도를 직선으로 횡단하는 중부 횡단항로(橫斷航路)이다. 이 항로는 당은포를 출발해 덕물도를 거쳐 옹진반도에서 황해를 직선으로 횡단해 산동반도의 등주에 이르는 최단거리 항로다. 황해를 횡단해야 했기 때문에, 물표(物標)로 삼을 만한 섬이나 육지가 없는 상태에서도 항해할 수 있는 원양항해술과 거친 풍랑에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선박을 건조할 만한 조선술이 발달해 있어야 했다.

 

 9세기에 들어 신라는 축적된 항해술과 조선술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서해안과 중국 동남해안을 잇는 황해남부 사단항로를 개척했다. 이 항로는 주로 영산강 하구의 회진(會津)을 출발해 절강성(浙江省)의 명주에 이르는 것으로, 이를 통해 중국의 남해로(南海路)와 연결되어 국제교역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 고려전기의 해상교통

 

 고려 전기 한·중 간의 해상항로는 중국의 정세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북송대에는 주로 북부 횡단항로를 이용하다가 북방민족의 압력이 거세지는 원풍연간(元豊年間, 1078~85) 이후 남송에 걸쳐서는 남부 사단항로를 활용했다. 고려시대 해상교통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고려 인종 원년(1123) 송나라의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했던 서긍(徐兢)이 저술한 '고려도경(高麗圖經)'이다. 이에 따르면 서긍은 남송(南宋)의 수도 변경(洙京, 현 개봉(開封))을 출발해 명주(明州, 현 영파(寧波))에서 바다를 따라 북상한 뒤, 정해(定海)에서 황해를 횡단했다. 서긍 일행은 정해를 출발한 지 9일 만에 고려의 흑산도에 이르러 다시 서해안을 따라 북상했고, 인천 연안을 지나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碧瀾渡)에 도착한 뒤 육로를 이용해 송도(松都)에 입성했다. 고려 전기의 대외 교역로는 '고려도경'에 기록된 서긍의 여정과 일치할 것으로 보이며, 그 길목에 있던 인천 연안에는 중국의 사신 일행과 연관된 적지 않은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 자연도(紫燕島)의 제물사(濟物寺)와 경원정(慶源亭)

 

 '고려도경'에 따르면 자연도(지금의 영종도)에는 경원정(慶源亭)이라는 관사(館舍)가 있고, 그 곁으로 막집[幕屋] 수십 칸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승려가 2~3명뿐인 제물사라는 조그만 절이 있었는데, 송나라 신종(神宗, 1067~1085) 때 사신 송밀(宋密)이 고려에 왔다가 이 섬에서 사망하자, 그 뒤로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면 제물사에 들러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11세기 후반에 영종도에는 경원정이라는 정자와 제물사라는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물사에 대한 기록은 고려의 문인들이 지은 시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려 후기의 문신이었던 이규보(李奎報. 1168~1241)1219년 계양부사를 지내면서 많은 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충원(忠原)의 서기 최인공(崔仁恭)과 자연도 제물원(濟物院)의 정자에서 놀며 판위에 걸린 제공(諸公)의 운을 따서 시를 짓다라는 제목의 율시가 있다. 이 시는 이규보가 자연도의 제물원에 있는 정자에 올라 지는 해와 바다의 경치를 보며 느낀 감상을 읊은 것이다. , 목은 이색(李穡)의 아버지 이곡(李穀, 1298~1351)이 남긴 제물사에서 묵으며 벽 위의 싯구에 차운하다라는 율시는 그가 제물사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정자에 올라 한밤의 정취를 시로 읊은 것이다. 이규보와 이곡은 모두 자연도 제물사(제물원)의 정자에 올라 시를 읊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정자가 '고려도경'에 기록되어 있는 경원정임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인천도호부 산천 조에 옛날 자연도에는 경원정이라는 객관(客館)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변어전고(邊圄典故)'에도 같은 내용이 전한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기능했던 인천 연안은 특히 중국과의 대외교역을 담당했던 사신들에게 있어 한 달 가까이 되는 긴 여정의 시점과 종점이었고, 이곳에서 그 여정의 무사귀환을 기원했던 것이다.

 

 오늘날 동북아의 허브도시로 성장하고 있는 인천의 모습은 이미 전근대 인천역사 속에서 한반도의 관문이자 대외교역의 요충지로서 주목받았던 것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자료제공 :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 다음 주는 <인천역사산책> 기획시리즈(9) “강화도의 참성단과 삼랑성 단군유지가 게재될 예정입니다.

 

 글쓴이 프로필

 

 배성수

 ▶인하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인하대학교 사학과 강사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