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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

38년간 ‘강도(江都)시대’를 경영한 강화도

by 형과니 2023. 4. 26.

38년간 강도(江都)시대를 경영한 강화도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19 08:56:30

 

38년간 강도(江都)시대를 경영한 강화도

임학성(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 고려정부의 강화도 천도

 

 13세기 전반, 질풍노도와 같은 정복 활동을 벌이던 몽골(蒙古)군의 침략(2차 침략) 기미가 보이자 고려 정부는 수도 개경(開京 : 현재의 개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했다. 때는 1232(고종 19) 여름(음력 7)이었는데, 이로부터 1270(원종 11) 5월 옛 수도인 개경으로 다시 돌아가기까지 강화도는 38년간의 강도(江都)시대를 경영하게 된다.

 

 고려정부가 내륙이 아닌 바다 한가운데의 섬인 강화로 수도를 옮긴 의도는 무엇일까? 이에는 그럴만한 조건이 여럿 있었겠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큰 조건은 강화도가 지닌 지리적 장점에 있었다. , 유목민족인 몽골은 바다에 대한 경험이 없기에 수전(水戰)에 취약한 약점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강화도는 조석간만의 차가 심해 방어 효과가 매우 크다는 점 때문이었다. 강화도가 지닌 이러한 지리적 보장(保障)의 장점은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계속 유지되었음을 볼 수 있다.

 

# 왕도로 탈바꿈한 강화도

 

 

홍릉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정부의 숙제는 강화도를 일국의 왕도(王都)로 건설하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임금이 살 집인 궁궐 축조가 최우선이었는데, 당시 최고 권력자 자리에 있던 무신(武臣) 최우(崔瑀)는 천도하기 약 20일 전에 2천 명의 군사를 강화도로 보내 궁궐 공사를 시작했다.

 

 왕도로서의 기본 시설과 면모가 갖추어진 시기는 천도 후 1년 반이 지난 12342월경이었다. 궁궐을 비롯한 각종 관아와 도로 등이 완공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방어시설인 성곽의 축조도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3성을 중첩되게 쌓았다.

 

 그런데 강도(江都) 건설의 마스터플랜(master plan)을 보면 궁궐은 물론 관청이나 사찰, 심지어 산까지도 옛 수도 개경에서 쓰던 이름을 그대로 들여와 강도에서 썼다는 점에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즉 강도는 개경의 복제품이자 쌍둥이였던 셈이다.

 

 물론 전시(戰時) 상태인데다가 몽골군이 강화도를 마주보는 연안지역에 주둔하고 있었기에 개경과 똑같은 규모로 강도를 건설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자도 부족했을 것이고, 또 그렇게 할 만한 여유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강도시대에 지어진 궁궐만도 수창궁(壽昌宮), 연경궁(延慶宮), 여정궁(麗正宮), 용암궁(龍巖宮), 진암궁(辰巖宮), 제포궁(梯浦宮) 등 여럿이 확인되는 점을 생각하면, 왕도로 건설된 강화의 규모 및 위상이 웅장했음은 분명한 것 같다.

 

 한편 강화 천도는 몽골군의 침략을 피하는 것이었기에 왕실 가족과 관료, 장병 및 그에 딸린 가족들도 강화도로 대거 밀려 들어왔다. 이 때 강화도에 함께 들어온 문신(文臣) 이규보(李奎報)강산 안팎에 일만 채의 집이 가득 들어찼으니, 옛 서울(개경을 말함)의 형승이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으랴고 찬양한 시가 전한다. 이는 시적 표현이기에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으나, 새 수도 강화도에 수많은 살림집이 밀집되어 건설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 고려시대 최대의 간척사업

 

고려궁터

 

 예나 지금이나 급작스런 도시 건설은 많은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는가 보다. 살림집이 계획성 없이 들어섬에 따라 화재가 빈번하게 발생해 한 번에 수백, 수천 채의 가옥이 잿더미로 변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갑자기 늘어난 주민들의 식량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지방으로부터의 조세 징수도 순탄치 않았다.

 

 이에, 강도(江都) 사람들은 섬 안에서 자체 해결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국가에 의한 대규모 간척(干拓)사업과 주민들 스스로의 신전(新田) 개간으로 진행되었다. 현재 높은 곳에 올라가 강화도의 지형을 둘러보면, 산과 산 사이에 넓은 논이 형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간척사업을 벌여 갯벌을 논으로 만든 것이다. 이 중 강화 본섬의 우측 상단과 중단에 형성된 대규모 논은 강도시대에 만든 좌둔전(左屯田)과 우둔전(右屯田)이라 한다.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려정부와 강화도 주민들이 합세하여 이루어낸 최대의 간척사업 결과였다.

 

#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강도(江都)’ 포장

 

 

이규보 무덤

 

 조선시대 때 간행된 자료 중에는 제목에 江都(강도)’가 들어간 것이 적지 않으며, 지금도 강화를 답사하다보면 강도또는 심도(沁都)’라고 쓴 간판을 더러 발견할 수 있다. 이 모두 고려 때의 수도였던 강화도의 옛 영화와 성세를 기억하고 내세우기 위함이겠다.

 

 전국의 지자체(地自體)마다 조금이라도 내세울만한 것이 있으면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과대포장하려고 혈안이 된 요즘, 인천시와 강화군은 강도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과대·과장은 하지 않더라도 제대로나마 포장(연구, 조사, 콘텐츠화 등)할 생각이 있는지를 묻고 싶다.

 

 더군다나 고려의 옛 수도 개성으로 가는 길이 열리고 있는 지금, 인천시와 강화군은 고려 때의 두 수도 개성과 강화를 연계하는 기획과 시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

〈※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글쓴이 소개 : 임학성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인하대학교 사학과 졸업 문학박사(조선시대사 전공)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및 인하대학교 사학과 강사

 ▶한국이민사박물관 자문위원, 한국역사민속학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