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간 ‘강도(江都)시대’를 경영한 강화도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19 08:56:30
38년간 ‘강도(江都)시대’를 경영한 강화도
임학성(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 고려정부의 강화도 천도
13세기 전반, 질풍노도와 같은 정복 활동을 벌이던 몽골(蒙古)군의 침략(제2차 침략) 기미가 보이자 고려 정부는 수도 개경(開京 : 현재의 개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했다. 때는 1232년(고종 19) 여름(음력 7월)이었는데, 이로부터 1270년(원종 11) 5월 옛 수도인 개경으로 다시 돌아가기까지 강화도는 38년간의 ‘강도(江都)시대’를 경영하게 된다.
고려정부가 내륙이 아닌 바다 한가운데의 섬인 강화로 수도를 옮긴 의도는 무엇일까? 이에는 그럴만한 조건이 여럿 있었겠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큰 조건은 강화도가 지닌 지리적 장점에 있었다. 즉, 유목민족인 몽골은 바다에 대한 경험이 없기에 수전(水戰)에 취약한 약점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강화도는 조석간만의 차가 심해 방어 효과가 매우 크다는 점 때문이었다. 강화도가 지닌 이러한 지리적 보장(保障)의 장점은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계속 유지되었음을 볼 수 있다.
# 왕도로 탈바꿈한 강화도
홍릉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정부의 숙제는 강화도를 일국의 왕도(王都)로 건설하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임금이 살 집인 궁궐 축조가 최우선이었는데, 당시 최고 권력자 자리에 있던 무신(武臣) 최우(崔瑀)는 천도하기 약 20일 전에 2천 명의 군사를 강화도로 보내 궁궐 공사를 시작했다.
왕도로서의 기본 시설과 면모가 갖추어진 시기는 천도 후 1년 반이 지난 1234년 2월경이었다. 궁궐을 비롯한 각종 관아와 도로 등이 완공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방어시설인 성곽의 축조도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내(內)·중(中)·외(外)의 3성을 중첩되게 쌓았다.
그런데 강도(江都) 건설의 마스터플랜(master plan)을 보면 궁궐은 물론 관청이나 사찰, 심지어 산까지도 옛 수도 개경에서 쓰던 이름을 그대로 들여와 강도에서 썼다는 점에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즉 강도는 개경의 복제품이자 쌍둥이였던 셈이다.
물론 전시(戰時) 상태인데다가 몽골군이 강화도를 마주보는 연안지역에 주둔하고 있었기에 개경과 똑같은 규모로 강도를 건설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자도 부족했을 것이고, 또 그렇게 할 만한 여유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강도시대에 지어진 궁궐만도 수창궁(壽昌宮), 연경궁(延慶宮), 여정궁(麗正宮), 용암궁(龍巖宮), 진암궁(辰巖宮), 제포궁(梯浦宮) 등 여럿이 확인되는 점을 생각하면, 왕도로 건설된 강화의 규모 및 위상이 웅장했음은 분명한 것 같다.
한편 강화 천도는 몽골군의 침략을 피하는 것이었기에 왕실 가족과 관료, 장병 및 그에 딸린 가족들도 강화도로 대거 밀려 들어왔다. 이 때 강화도에 함께 들어온 문신(文臣) 이규보(李奎報)가 “강산 안팎에 일만 채의 집이 가득 들어찼으니, 옛 서울(개경을 말함)의 형승이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으랴”고 찬양한 시가 전한다. 이는 시적 표현이기에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으나, 새 수도 강화도에 수많은 살림집이 밀집되어 건설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 고려시대 최대의 간척사업
고려궁터
예나 지금이나 급작스런 도시 건설은 많은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는가 보다. 살림집이 계획성 없이 들어섬에 따라 화재가 빈번하게 발생해 한 번에 수백, 수천 채의 가옥이 잿더미로 변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갑자기 늘어난 주민들의 식량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지방으로부터의 조세 징수도 순탄치 않았다.
이에, 강도(江都) 사람들은 섬 안에서 자체 해결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국가에 의한 대규모 간척(干拓)사업과 주민들 스스로의 신전(新田) 개간으로 진행되었다. 현재 높은 곳에 올라가 강화도의 지형을 둘러보면, 산과 산 사이에 넓은 논이 형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간척사업을 벌여 갯벌을 논으로 만든 것이다. 이 중 강화 본섬의 우측 상단과 중단에 형성된 대규모 논은 ‘강도시대’에 만든 좌둔전(左屯田)과 우둔전(右屯田)이라 한다.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려정부와 강화도 주민들이 합세하여 이루어낸 최대의 간척사업 결과였다.
#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강도(江都)’ 포장
이규보 무덤
조선시대 때 간행된 자료 중에는 제목에 ‘江都(강도)’가 들어간 것이 적지 않으며, 지금도 강화를 답사하다보면 ‘강도’ 또는 ‘심도(沁都)’라고 쓴 간판을 더러 발견할 수 있다. 이 모두 고려 때의 수도였던 강화도의 옛 영화와 성세를 기억하고 내세우기 위함이겠다.
전국의 지자체(地自體)마다 조금이라도 내세울만한 것이 있으면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과대포장하려고 혈안이 된 요즘, 인천시와 강화군은 ‘강도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과대·과장’은 하지 않더라도 제대로나마 포장(연구, 조사, 콘텐츠화 등)할 생각이 있는지를 묻고 싶다.
더군다나 고려의 옛 수도 개성으로 가는 길이 열리고 있는 지금, 인천시와 강화군은 고려 때의 두 수도 개성과 강화를 연계하는 기획과 시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
〈※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글쓴이 소개 : 임학성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인하대학교 사학과 졸업 문학박사(조선시대사 전공)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및 인하대학교 사학과 강사
▶한국이민사박물관 자문위원, 한국역사민속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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