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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

세계의 보물 ‘팔만대장경판’을 만들어 낸 강화도

by 형과니 2023. 4. 26.

세계의 보물 팔만대장경판을 만들어 낸 강화도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19 08:58:59

 

세계의 보물 팔만대장경판을 만들어 낸 강화도

임학성(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 대장경(大藏經)팔만(八萬)대장경’, ‘팔만대장경판()’

 

 대장경(大藏經)이란 불교와 관련된 경((()의 삼장(三藏)을 집대성한 것으로 경장(經藏 Sutta Pitaka)’은 석가모니의 말씀을 모은 것이고, ‘율장(律藏 Vinaya Pitaka)’은 교단이 지켜야 할 계율을 모은 것이다. 그리고 논장(論藏 Abhid-harma Pitaka)’은 교리에 관해 뒤에 제자들이 연구한 주석 논문을 모은 것을 말한다. 따라서 대장경은 불교 연구에 관한 자료 문헌을 총망라한 불교총서라 하겠다.

 

 잘 알다시피 팔만대장경은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최고(最高)의 인쇄문화재다. 그런데 앞에서 설명한 대장경에다가 팔만(八萬)’이란 수식어를 붙이게 되면 대장경이 팔만인지· ‘팔만 개의 경··논을 집대성한 대장경인지 참 아리송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구심이 생기는 까닭은 엄밀히 따져 팔만대장경은 그릇된 용어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용어는 (물론 이 또한 별칭 가운데 하나이지만) ‘팔만대장경판이 맞다. ‘대장경판()이 대략 팔만 개이기에 붙여진 애칭(?)인 것이다. 여기서 ()’은 대장경을 인쇄하기 위해 글씨를 새겨 넣은 목판을 말한다. 물론 이 팔만대장경판을 갖고 인쇄한 책자를 일컬어 팔만대장경이라 한다면 크게 시비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

 

 # ‘팔만대장경판의 제작 배경

 

 팔만대장경판은 고려시대 1236(고종 23)에 착수해 1251(고종 38)에 완성되었다. 이 기간은 바로 대몽항쟁을 위한 강도(江都)시대에 해당한다. 국운이 위태로웠을 당시, 16년이란 오랜 시간을 들여 8만 개가 넘는 대장경판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부처님의 힘으로 몽골족의 침략을 물리친다는 상징성에 있었다. 실재 이보다 200여 년 앞서(1011·현종 2) 거란족이 침공했을 때 대장경판을 만들었고(‘초조대장경판 初彫大藏經板’), 이어 거란족이 물러났던 사실이 있었던 것이다. , ‘팔만대장경판제작은 옛날의 우연(?)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염원의 발현이었다.

 

 

13세기 동아시아 형세

 

 이뿐만 아니라, 팔공산의 부인사(符仁寺)에 보관하던 초조대장경판속장경판(續藏經板)’ 등 여러 대장경판이 1232년 몽골군에 의해 소실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로써 대장경판을 다시 만들 당면 과제도 생겨났던 것이다. 이에 팔만대장경판다시 만든 대장경판이라 해 재조대장경판(再彫大藏經板)’으로도 불린다.

 

 # ‘팔만대장경판을 제작하고 보존한 강화도

 

 팔만대장경판제작 사업은 새로운 수도 강화에서 주관했다. 강화 천도 4년 후인 1236년에 고려 정부는 대장경판 제작을 총괄하기 위해 대장도감(大藏都監)을 강도에 설치했던 것이다.

 

 한편 경판에 쓰일 판목(板木)을 벌목하고, 판각 작업의 순행을 위해 대장도감 외에 경상도 남해(南海)에 이른바 분사(分司)대장도감을 두기도 했다. 그러나 팔만대장경판제작의 시작과 끝은 물론 그 주된 작업이 이루어진 지역이 강화도였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려사(高麗史)의 고종 38(1251) 9월 기사를 보면 임금이 성()의 서문(西門) 밖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에 행차하여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향()을 올렸다. 현종(顯宗) 때 새겼던 판본은 임진년(1232)에 몽골의 침입으로 불탔기 때문에 임금이 여러 신하들과 다시 발원하여 대장도감을 세워 16년 만에 사업이 끝난 것이다는 내용이 보인다. 완성된 팔만대장경판을 강화성의 서문 밖 대장경판당에 보관했고, 12519월 고종 임금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이곳에 행차해 대장경판의 완성을 축하하는 의례를 행했음을 알려 준다.

 

 또 다른 기사를 보자.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된 박전지(朴全之)'영봉산용암사중창기(靈鳳山龍岩寺重創記)'인데, “1317년에 대선사(大禪師) 승숙(承淑)과 중덕(中德일생(日生) 등이 강화도의 판당(板堂)에 가서 (대장경의) 부족한 함()의 권(()을 인출(印出)해 왔다는 내용이다. , 일부 사찰에서 팔만대장경판당이 있는 강화도에 사람을 보내 대장경을 인쇄했다는 것이다.

 

 

선원사 터

 

 이들 기사에서 보듯이 팔만대장경판은 고려 정부가 수도를 개경으로 다시 옮긴 이후에도 계속 강화도에 보관되었다. 수도를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대장경판을 강화도에 그대로 둔 것을 보면, 아쉽게도 지금 그 장소를 명확히 확인하지 못하고 있으나 강화성 서문 밖에 있었다는 대장경판당이 경판을 보관하기에 최적의 장소였음을 짐작케 해준다.

 

 그러나 고려 말 이래 왜구가 강화도에 들어와 노략질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자 13985(음력) 조선의 태조 임금은 팔만대장경판의 안전을 위해 서울의 흥천사(興天寺)로 옮겨갔고, 이어 합천의 해인사(海印寺)로 다시 옮겼던 것이다.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팔만대장경판

 

 금년 614일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문화기구) 8차 세계기록유산국제자문위원회는 팔만대장경판을 세계기록유산으로 결정한 뒤, 71일 공식 등재했다. 공식 등재 명칭은 합천 해인사 소장의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諸經板)’이다. ‘팔만대장경판’(고려대장경판)과 함께 해인사가 보관하고 있는 모든 경판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그 가치에 비해 등재가 지연된 점은 매우 섭섭하나 그나마 뒤늦게라도 등재되어 다행이며 쾌거라 하겠다.

 

 이로써 우리는 훈민정음 해례본, 조선왕조실록(이상, 199710), 직지, 승정원일기(이상, 20019), 그리고 조선왕조 의궤(儀軌)’와 합천 해인사 소장의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諸經板)’(이상, 20077) 6건의 세계기록유산을 등재한 국가가 되었다. 국가별 등재 순위로 보면 세계 5(프랑스·덴마크·러시아 등과 공동)에 해당한다. 기록유산에 관한한 세계 최고의 수준인 것이다.

 

 그런데 위 6건의 세계기록유산 중 강화도와 관련된 것이 2건이나 된다. 바로 조선왕조실록과 팔만대장경판이다(강화도와 조선왕조실록에 대해서는 본 인천역사산책에서 추후 연재할 예정이다). 이 또한 인천시와 강화군이 긍지를 지닐 문화 요소라 하겠다.

 

 # ‘팔만대장경판의 우수성

 

 팔만대장경판의 우수성을 들자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몇 가지 가장 뛰어난 점만 열거하면 첫째, 전 세계에 현존하는 대장경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둘째,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셋째, 판각된 수천만 자가 모두 고르며 오자(誤字)와 탈자(脫字)가 없다는 점 등이다. 또한 자체(字體)의 예술성도 뛰어나 조선의 명필인 한석봉이 이를 보고 육필(肉筆)이 아니라 신필(神筆)이다고 경탄할 정도였다.

 

 〈※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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