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인천상륙작전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19 23:57:43
한국전쟁과 인천상륙작전
견수찬(인하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 견수찬(인하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전쟁은 50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 상처를 다 치유하고 있지 못할 정도로 우리 민족과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3년간의 격렬한 전쟁으로 말미암아 한반도는 초토화되었고, 헤아릴 수 없는 사상자와 전쟁피해자가 생겨났으며, 이 과정에서 더욱 증폭된 대립과 증오로 분단체제는 더욱 공고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3년여의 처절한 공방을 주고받는 동안 국토의 모든 곳이 전장과 다름없었지만, 전쟁의 운명을 건 대 혈전이 벌어진 인천상륙작전에는 더욱 막대한 병력과 물자가 투입된 대규모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 블루하트계획과 크로마이트계획
맥아더 사령부는 개전 초기 북한군의 공세를 오산-차령산맥 선에서 저지하고, 제1기병사단을 인천 등의 후보지에 상륙시켜 협공해 전세를 역전시킨다는 블루하트(Blue Heart) 작전계획을 마련했지만, 7월 22일경으로 예정된 작전은 미 제24사단이 북한군의 빠른 남하를 저지하지 못함에 따라 7월 10일경 취소되고 말았다.
블루하트작전이 취소된 이후에도 맥아더는 상륙작전을 포기하지 않고 합동전략기획단으로 하여금 상륙작전계획을 입안해 검토하게 했다. 이에 7월 23일 '크로마이트(Chromite)'라 명명된 작전계획으로 인천상륙계획(100-B), 군산상륙계획(100-C), 주문진상륙계획(100-D)의 3개안을 작성해 미 극동사령부의 참모회의에 회람했는데, 인천상륙계획이 가장 좋은 평가를 얻음에 따라 이 안이 8월 12일 공식적으로 확정됐다. 그러나 세부계획을 입안하고 최종 승인을 얻기까지는 많은 어려움과 반대를 극복해야만 했다. 특히 8월 23일 도쿄에서 맥아더를 비롯해 극동사령부의 주요 지휘관과 참모들이 참가한 전략회의에서는 계획의 타당성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인천은 “아마도 일찍이 상륙공격 지점으로 선정된 가장 나쁜 장소”라는 훗날의 언급처럼 반대론자들이 우려하고 있는 것들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 상륙부대 이동상황
# 인천상륙의 타당성을 둘러싼 논란
격렬한 내부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계획의 최초 입안자인 맥아더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는 천연의 장애물은 인정하지만 이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대안으로 제시된 군산상륙계획에 대해서도 얕은 포위망을 구축하는 데 그쳐 적군에 큰 타격을 줄 수 없다고 반박했다. 아울러 북한군이 낙동강 방어선에 집중되어 인천상륙에 대비할 예비력을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상륙부대가 패퇴할 위험은 없으며 모든 불리한 여건이 기습의 이로움이 되며 작전을 통해 10만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훗날 참가자들에게 감동적인 연설로 기억되는 맥아더의 1시간여에 걸친 이 설득을 기점으로 반대론은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9월초에 시작된 북한군의 총공세로 낙동강 방어선이 위험에 빠지면서 일부 상륙병력이 지상전에 급거 투입되는 등 상륙작전계획은 일시 혼란을 겪게 됐다. 방어선의 전황이 불리해지자 곤경에 처한 미 제8군을 구하기 위해 맥아더의 상륙부대가 부산에 입항하거나 군산에 상륙하기를 바라는 압력이 가중됐지만,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버틴 맥아더의 설득으로 최종 승인을 얻어 큰 변화 없이 예정대로 추진됐다.
▲ 중구 일대를행진하는 군인들
# 인천상륙작전의 전개
인천상륙작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이전에 상륙지역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중폭격이 9월 4일부터 9월 15일까지 계속됐다. 해병대 항공기는 9월 10일에 네이팜탄으로 월미도를 폭격한 이래 65회에 걸쳐 인천지역을 폭격했다. 이어 제1단계 상륙작전 대상인 월미도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어 미 제5해병대 3대대가 그린비치에 상륙해 월미도를 장악했다. 한편 1단계 상륙과 2단계 상륙 사이에는 11시간의 간격이 있어 이 기간이 상륙군으로서는 가장 위험한 시간이었는데, 이 때문에 해군과 공군은 인천 주변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모든 통로에 차단사격을 실시했다. 오후 만조에 때맞춰 미 제5해병연대가 레드비치에 상륙해 22분 후에는 묘지고지를 점령하고, 관측고지를 점령함으로써 교두보 확보에 성공했다. 뒤이어 미 제1해병연대가 블루비치에 상륙, 인천의 해안선을 장악해 나갔고, 인천의 방어선을 강화했다. 한편 국군 해병대는 9월 15일 오후 8시에 레드비치로 상륙한 후 인천시가 소탕전과 외곽 경비에 임했다. 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경인가도를 중심으로 미 제5해병대는 북쪽, 제1해병대는 김포, 영등포방향으로 진격했다. 9월 18일 미 제5해병대는 김포비행장을 탈환한 후 국군해병대와 합세해 신주나루로 향했으며, 이날 미 제1해병대도 소사를 통과, 이튿날에는 영등포 근방가지 진격했다. 한편 9월 18일부터 19일 사이에 인천에 상륙한 국군 제17연대와 미 제7사단 32연대는 영등포 남쪽으로, 미 제31연대는 수원방면으로 급진해 각각 서울 수복과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 인천상륙작전의 결과
▲ 상륙작전 당시 인천항
인천상륙작전은 장거리 기동으로 낙동강 연안에 포진한 북한군의 주력을 회피해 북한군 후방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해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킨 현대 전쟁사에서 가장 극적인 전투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근래 공개된 미군 노획문서와 관련 전문가의 연구에 따르면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사전에 알지 못하고 기습을 당했다는 통설은 잘못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 전황을 극적으로 반전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인천상륙작전의 결과,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은 급속히 와해됐고, 연합군은 서울을 탈환해 북한군의 병참선을 전면 차단하는 동시에 패주하는 북한군 병력을 궤멸시켰다. 아울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는 병참시설을 확보해 이후 38선 이북으로의 반격을 준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 다음 주는 <인천역사산책> 기획시리즈(16) '말목장이 세워진 인천의 섬들'이 게재될 예정입니다.〉
# 글쓴이 : 견수찬
- 인하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 인하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근대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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