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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

말목장을 둔 조선시대 인천의 섬들

by 형과니 2023. 4. 26.

말목장을 둔 조선시대 인천의 섬들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19 23:59:24

 

말목장을 둔 조선시대 인천의 섬들

임학성(인하대 사학과 강사)

 

 # 인천의 정체성은 해양

 

 

접역도 속의 인천

 

 조선시대에 들어와 외국과의 바닷길을 막는 정책을 세우기 전까지 인천은 대외 해상교통의 주요 거점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성(漢城)시대에 백제 사신이 중국으로 오고갔던 항구 한나루[대진(大津)]’와 고려 때 중국의 사신이나 상인이 묵었던 객사(客舍) ‘경원정(慶源亭)’ 등의 존재가 입증해 주고 있다.

 

 현재의 인천광역시 영역에는 총 152개의 섬이 있으며, 이 가운데 유인도가 38, 무인도가 114개라고 한다('인천의 섬',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2004). 아마 인천에 그렇게 많은 섬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천의 정체성은 해양에 있다고 하겠다. 인천이 처한 위치가 수도 서울과 가깝다 보니 그동안 모든 일상을 서울 중심, 육지 중심으로 인식하고 생활했기에 우리는 인천이 가진 바다와 섬의 장점·혜택을 잊거나 잃고 있었을 따름이다.

 

 이러한 망실(忘失) 현실에 조금이나마 자극을 주는 의미에서 이번 역사산책의 대상으로 인천의 섬을 택했고, 주제로는 말목장[馬牧場]을 둔 인천의 섬으로 잡았다.

 

현재 한반도의 섬 가운데 말목장을 볼 수 있는 곳은 제주도뿐이다. 이 유일함은 관광자원이 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인천의 여러 섬들에도 말목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제 조선시대로 들어가 보자.

 

  # 조선시대의 마정(馬政)

 

 기차와 자동차라는 괴물(?)이 등장·확산되기까지 말은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다. 전근대시대 말의 중요성은 나라의 강약은 말에 있으니, 임금이 부유한 지를 물으면 말의 수로 대답한다(國之强弱 在馬 故問 國君之富 數馬以對)”는 문장이 극명하게 대변해 준다.

 

 

여지도 속의 인천

 

 조선왕조는 군사와 교통에 관한 일을 주관한 병조(兵曹)의 하부 관청으로 사복시(司僕寺)를 중앙에 두어 말 사육 및 전국의 목장을 관리하도록 했다. 또한 지방에는 감목관(監牧官)을 배치해 말 사육 및 목장의 운영 실태를 감독·독려하도록 했다. 물론 목장에서 말과 함께 생활하며 사육을 전담한 자는 목자(牧子)였다. 목자 1인에게 할당된 말은 암말 25필씩이었다. 말이 병들거나 죽거나 도망치면 목자에게 그 책임을 물었으니 목자는 고역(苦役) 중의 고역이었다.

 

 그런데 목자는 대체로 섬 주민 가운데 뚜렷한 국역(國役)이 없는 자들에게 맡겼다. 고려 몽골 지배기에 탐라[제주도]에 목장을 설치해 말을 키운 것이 전례가 되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이 방식을 답습했던 것이다. 섬은 말 사육에 좋은 해풍(海風)과 마꼴[마초(馬草)]이 풍부했으며, 특히 말이 멀리 도망갈 염려가 없었기에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 나라의 말을 놓아 키운 인천의 섬들

 

 인천은 앞바다에 여러 섬들이 놓여있는 지리적 특성이 있었기에 일찍부터 목장이 설치되었다. 고려 말엽 강화도의 강음목장은 전국 10대 목장의 하나로 꼽힐 정도였으며, ‘매음도목장은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를 격퇴할 때 탔다는 명마 사자황(獅子黃)’의 산지로 유명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강화도의 목장 설치는 꾸준히 논의되고 추진된다. 심지어 태종은 강화도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켜 섬 전체를 목장으로 만들려고까지 하였다(1415). 물론 이 계획은 대신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으나, 그 만큼 강화도를 비롯한 인천지역의 여러 섬들이 말목장을 두기에 적합한 장소로 국가가 인정했음을 말해 준다. 인천지역 섬들은 서울과 가까워서 사복시 관리가 왕래하기에 편하다”, “국가에 긴급한 일이 있을 때 말의 수송이 용이하다”, “수초(水草)가 풍족하여 말 사육에 적당하다는 등 말목장을 두기에 좋은 입지 조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인천지역의 목장 현황

 

 조선시대 자료에서 인천지역의 섬에 설치된 말목장수를 살펴보면(<> 참조), 15세기 전반기에 10('세종실록지리지'), 16세기 중엽에 21('신증동국여지승람'), 17세기 후반기에 11('목장지도'), 18세기 중엽에 12('여지도서'), 그리고 19세기 중엽에는 9('대동지지')로 나타난다. 17세기 후반기에 목장수가 절반 정도로 격감한 까닭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섬 주민들이 감시·관리가 부실한 것을 틈타 목장 초지(草地)를 전답으로 경작하거나, 군진(軍鎭)에서 운영경비로 쓸 둔전(屯田)을 개간하는 일이 많았던 때문으로 이해된다.

 

 19세기 중엽까지 말목장이 남아있었던 인천지역의 섬은 용유도·무의도·영흥도·이작도·신도·장봉도·백령도·거도·동검도 등이다. 이들 9개 섬 가운데 거도와 동검도를 제외한 7개 섬은 목장의 연원이 조선 전기까지 올라감을 볼 수 있다. 특히 영흥도 목장의 경우 '목장지도(牧場地圖)'에 따르면 말이 119, 목자가 281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규모는 당시 전국 53개 처의 목장(제주지역 제외) 가운데 마필수로는 20번째, 목자수로는 3번째에 해당하는 큰 규모였다.

 

 # 말목장 복원은 어떠한지?

 

 우리는 육지에서 바다로 관심을 돌려야할 새로운 시대를 앞두고 있다. 이웃 일본의 경우 남태평양의 아주 조금한 산호초를 구입해 대량으로 산호를 키우고 있다고 한다.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면 섬으로 인정받아 자기들의 국토를 넓히려는 속셈인 것이다. 이는 섬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섬으로 인해 얻게 되는 바다 영토가 대단하기 때문이다.

 

 바다, 그리고 그에 떠있는 섬을 지키고 키우려면 지극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관심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일단은 사람들이 자주 찾아가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자그마치 152개의 섬을 갖고 있는 인천! 사람들이 이곳을 자주 찾게끔 할 콘텐츠를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 하나로 예전에 말목장이 있었던 모든 섬은 아니더라도, 영흥도 정도에 말목장 하나쯤은 복원해 보는 것이 어떠한지?

 

 〈※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