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의 왕릉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19 09:00:06
강화의 왕릉
이희인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 이희인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리워지는 강화(江華)는 사람들에게 몽고와의 전쟁시기에 고려왕조의 수도(首都)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외세의 침입에 맞섰던 호국(護國)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강화도에는 초지진, 광성보 등과 같이 조선시대 만들어진 국방유적이 잘 남아 있어 그 명성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지만 고려시대와 관련해서는 40여 년간이라는 적지 않은 기간동안 고려왕조의 수도로 자리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상할 정도로 강화에서 당시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오늘날 강화도에서 고려시대의 것으로 전해져 오는 유적들 중에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는 많은 유적이 전쟁 등으로 파괴되거나 또는 후대의 생활공간에 자리한 탓에 훼손된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 강화도 곳곳에는 고려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남아있는데, 당시 사람들이 묻힌 무덤이 바로 그것이다. 무덤은 건물이나 집자리 등과는 달리 후대의 생활공간과 분리되어 있는 덕택에 상대적으로 훼손이 적어 당시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강화도의 고려시대 무덤은 강화천도기의 문화, 더 나아가 고려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강화에는 개성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왕릉과 왕비릉이 남아 있어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 강화왕릉
# 고려시대 왕릉(王陵)의 형태
태조 왕건릉을 비롯한 고려 왕실의 무덤은 강화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고려시대 수도였던 개성지역에 모여 있다. 강화에는 천도기간 동안 생을 마감한 왕과 왕비의 무덤 4기가 남아 있다.
고려시대 왕릉은 대부분 산지의 남쪽 경사면 중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명당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무덤을 만들 때에는 산지의 경사면을 따라 장방형으로 묘역을 조성한 뒤 석단을 이용해 묘역을 3~4단으로 구분하고 묘역의 가장 높은 부분에 시신을 안치한다. 그 아래로는 돌로 된 석상(石像)과 각종 조각〔石物〕을 세운다. 봉토는 둥그런 원형이며, 지름이 대략 10m 내외이다. 봉분 하단에는 12지신(十二支神)을 새긴 병풍석을 설치하고 그 바깥으로 난간석을 배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봉분 주변을 돌담으로 ‘ㄷ’형으로 둘러싸는 곡장(曲墻)이 설치되는 점이 특징적이다.
시신이 안치되는 매장부는 지하나 반지하에 돌로 방〔室〕의 형태를 만든 돌방〔石室〕이다. 돌방무덤〔石室墓〕은 삼국시대부터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왔던 무덤형식이기도 하다. 돌방은 무덤마다 편차가 있지만 동서 3m, 남북이 3.5m, 높이 2m 내외의 규모로 깬 돌이나 다듬은 판돌을 이용해 만든다. 돌방의 중앙에는 관을 놓은 관대(棺臺)가 설치되며 옆으로 유물을 안치하는 부장대(副葬臺)가 놓여지기도 한다. 돌방의 바닥은 흙바닥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벽돌을 깔아놓기도 한다. 출입구의 구조는 남쪽의 벽체를 쌓지 않고 문주석을 양쪽에 세운 뒤 바닥에 문지방석을 두고 그 사이를 판석 1매로 마감해 출입문의 형태로 만든다.
# 강화의 고려왕릉(高麗王陵)
▲ 가릉
강화도에는 고려 희종(熙宗)의 석릉(碩陵)과 고종(高宗)의 무덤인 홍릉(洪陵) 등 왕릉 2기와 곤릉(坤陵), 가릉(嘉陵) 등 왕비릉 2기가 있다. 이밖에 묻힌이를 알 수는 없지만 능내리 석실묘와 같이 왕릉급 규모를 가진 무덤 3기가 분포한다. 최근 석릉과 곤릉, 가릉 등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당시 왕릉의 구조와 매장방식을 보여주는 생생한 자료가 출토되었다.
강화의 고려 왕릉은 1970년대 이루어진 묘역 조성공사로 인해 외형이 일부 변화되기는 했지만 입지나 형태 면에서 개성의 왕릉과 큰 차이는 없다. 무덤이 자리한 곳은 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의 중턱으로, 동쪽과 서쪽으로는 계곡과 능선이 무덤을 감싸 안는 듯한 형태를 띠고 있다. 홍릉을 제외한 강화도의 왕릉과 왕비릉들이 모두 진강산(鎭江山) 일대에 집중되어 있는 점이 특징인데, 강화 천도시기 당시 이 지역이 지배층의 매장지(埋葬地)로서 선호되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왕릉 발굴결과 대부분 도굴된 상태로 상당수의 유물이 이미 사라진 뒤였으나 접시, 잔, 대접 등의 청자와 토기, 목관에 사용되었던 관정, 금박편, 그리고 구슬, 동전 등이 출토되어 아쉬우나마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왕(비)릉 중 제일 먼저 발굴이 이루어진 석릉은 고려 21대 왕인 희종(1169~1237)의 무덤이다. 희종은 최충헌에 의해 왕위에 즉위했으나, 뒤에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해 폐위되었다. 이후 한차례 유배를 당한 뒤, 복위설(復位說)에 휩싸여 교동(喬桐)으로 재차 유배되어 사망한 비운의 인물이다. 돌방의 천정 위에는 8각형의 봉분호석과 난간시설이 설치되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석릉주변으로 100여 기의 고려시대 돌덧널무덤〔石槨墓〕이 분포하고 있어 강화도에서는 가장 최대 규모의 고려시대 무덤떼〔古墳群〕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 곤릉 무덤방
곤릉은 고려 22대 왕인 강종(康宗)의 비이자 고종의 어머니인 원덕태후(元德太后)의 무덤이다. 원덕태후의 생몰연대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아 추정은 어렵지만 1253년 정강(靖康)의 시호를 받는 것으로 보아 그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돌방의 벽면에 진흙을 바르고 회를 칠한 흔적이 남아 있다. 무덤에서는 삼족향로, 쇠못과 동전, 금동장식품, 귀목문 암막새 등이 출토되었다. 가릉은 고려 24대 원종(元宗)의 비이자 충렬왕(忠烈王)의 어머니인 순경태후(順敬太后)의 무덤으로 고종 31년(1244)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고려 왕릉은 무덤방이 지하나 반지하에 설치된 것이 보통인데 지상위에 설치된 점이 독특하다. 벽면에는 회를 칠하였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던 흔적이 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 당(唐)·송(宋)대 동전과 호박제 구슬, 은제 고리 장식, 도기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이밖에 강화도에는 왕릉과 왕비릉 이외에 이들과 유사한 규모와 구조를 가져 왕실 또는 최상위 지배층의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돌방무덤도 남아 있고, 왕릉은 아니지만 강화도 전역에 걸쳐 고려시대의 덧널무덤과 움무덤〔土壙墓〕들이 남아 있어 당시의 자취를 느껴 볼 수 있다.
〈※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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