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과 인천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19 08:57:42
광복과 인천
이 현주 국가보훈처 연구관
# ‘해방’ 인천, 물러나는 일제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36년간에 걸친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되었다. 광복은 소수 친일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한민족 성원 모두의 환희요 감격이었다. 1930~40년대 일본 제국주의 파시즘 치하의 고단한 현실에서 민족의 광복을 고대하던 모두에게 광복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심훈, 「그날이 오면」, 1930.3) 환희의 날이었다.
해방과 기쁨
감격과 흥분은 인천도 예외가 아니었다. 광복 전의 인천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에 따른 최초의 개항장으로, 외국인 거류지인 조계가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어느 도시에 비해 일본인 거주자들이 많았다. 인천의 상징인 각국공원(현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구 인천의 중심부는 일본인들 비롯한 외국인들이 ‘점령’, 인천의 그야말로 식민지 근대화의 첨병 역할을 하던 전진기지였기 때문에 광복을 맞는 인천의 표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인천은 일본인들이 항복을 앞두고 한국을 탈출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다른 어느 지역보다 광복의 예감이 빨랐다.
…인천에서도 8월 들어서면서 이상한 일들이 눈에 띄게 되었다. 미군 공군기의 공습이 아주 사라진 것, 그리고 특히 만주에서 피난 온 듯한 일본인 행렬과 관동군 패잔병들의 출현 등이 그것이었다… 8월 14일에는 다음날 정오에 일본 천황의 특별방송이 있으리라는 소문이 퍼졌지만 시중에 라디오가 별로 없는 형편이라서 별로 관심을 끌지는 못하였고,… 그래도 무슨 소식이라도 있나 궁금하여 집에서 라디오를 만져보았지만 부품이 없어 고장난 지 이미 오래였고 그래 할 수 없이 답동성당 신부방에 그 시간이 되어 가보니 벌써 많은 교우들이 모여 있었다. 12시에 일왕의 담화가 시작되었지만 그곳의 라디오마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여 무슨 이야기인지 아무도 알아듣는 이가 없어서 궁금증만 더해 주었다. ‘항복이다’, ‘아니다’라고 야단들이었는데, 마침 2시 경에 공습경보가 울리고 대공포 소리가 요란하게 인천상공에 퍼지니 항복론은 쑥 들어가 버렸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저녁 6시쯤 경동거리 애관극장 앞길에서 요란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오기에 집을 뛰쳐나와 그리로 가본 나는 참으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애관극장 앞길을 메운 군중은 수백명이 넘었는데, 이들이 언제 준비하였는지 ‘조선독립만세’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만세 삼창을 외치면서 내동 사거리를 지나 일본인들이 사는 동네로 행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물결 속에서 나는 삼촌이 말했던 태극기를 처음으로 보았다. 감추어 두었던 것인지 아니면 항복을 알고 난 후에 급조한 것인지는 몰라도 일왕 담화 몇 시간 후에 그 깃발이 휘날리게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 죽은 듯이 일제정치를 인내해 온, 바보스럽게만 보였던 조선인들에게 영원히 불타는 애국심과 민족정신이 엄연히 살아 있었다는 역사의 증언을 나는 그 순간 비로소 알아차리게 되었고, 인중(인천중학교, 인용자) 생활로 인해 일본인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있었던 나는 그후 여러 날 동안 잠을 잊은 채 그 흥분의 도가니 속에 빠지게 되었다(임명방, 「인중시절과 태극기에 대한 기억」, 1994)
▲ 전쟁막바지의 인천항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알리는 일왕(日王)의 떨리는 목소리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들리자 일본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36년간 일제의 억압 아래 억눌려 있던 한국인들은 광복의 기쁨에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희의 물결을 이루었다. 일본인들은 그들이 저질러온 만행으로 인해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미군이 상륙할 때까지 자구책을 강구해야 했다. 그들은 먼저 자신들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세화회(世話會)를 조직해 잔류 일본인들의 단합을 꾀하는 한편, 전쟁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재향군인들을 무장시켜 순사 복장으로 각 파출소를 경비하는 등 한국인들의 응징에 대비했다. 인천에서도 일본인들은 인천세화회를 조직하고 신변안전과 본국 귀환활동을 전개했다.
# 상륙하는 미군, 미완의 해방
광복의 감격 속에 인천은 미군이 남한을 점령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미군이 남한을 군사적으로 처음 점령한 것은 제24군단 7사단 예하의 제17·32·134 보병연대였다. 미군의 남한 점령은 2단계로 진행되었는데, 첫째 인천과 서울 주변은 즉시 점령할 지역이며, 둘째 38도선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대략 반경 50마일 이내로 북쪽으로 확대한다는 방침이었다. 미군의 이러한 방침에 따라 9월 8일에 육군 선도대가 인천에 도착했으며, 이튿날 늦게 7사단의 병력과 장비의 하역이 완료되었다. 그 뒤 인천지역은 제17보병연대에 인계되었다.
당시 미군은 인천에 상륙하는 과정에서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다. 무장한 많은 일본군 장교와 병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고, 부두 주변의 주요 교차로에는 검은 코트를 입은 일본인 경찰이 경비를 서거나 말을 타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소총으로 무장하고, 착검하고 있었다. 미군은 일본인 경찰들의 경비 때문에 한국인들의 대규모 시위를 방지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미군의 인천상륙은 인천시민들에게 가슴 아픈 기억을 남기면서 이루어졌다. 바로 미군과의 주요한 첫 사건이 미군이 상륙하기 몇 시간 전에 일어났던 것이다. 당시 인천지역의 건국준비위원회 산하의 보안대, 노동조합원들은 미군의 인천상륙을 환영하기 위해 연합국기를 들고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에 일본인 경찰들은 환영나온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발포, 두 사람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을 했다.
미군의 남한 첫 점령인 인천상륙은 비극적인 사건을 기록에 남겼고 미군은 이러한 사건을 뒤로 한 채 본격적인 남한점령에 들어갔다. 미군의 남한점령은 각 지방에 대한 미 전술군의 단계적인 군사적 점령과 병행해 중앙에서의 군정대에 의한 미군정 체제의 구축이 기본적인 내용을 이루었다. 미 전술군의 군사점령은 1945년 9월 8일 인천상륙 이후 서울과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시작하여 같은 해 11월 제주도를 마지막으로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미 전술군이 각 지방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면서 각 지방에는 미군정이 실시되었는데, 중부지방은 7사단, 호남지방 6사단, 영남지방 40사단으로 각각 편제되었다. 당시 인천은 미군이 상륙한 지역이고 서울과 가까운 인접지역이었으므로 일찍부터 미군의 점령을 받게 되었다. 미 전술군 군사점령의 제1단계는 제7사단의 서울·경기지역 점령이었다. 서울·경기지역 점령은 9월 12일부터 시작되어 23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서울 주변 50마일 둘레의 개성과 수원, 춘천이 포함되었다. 제7사단의 3개 연대와 제24군지원단(ASCOM 24, 인천지역)이 중심이었다. 미군은 서울과 부산, 전주에 각각 사단사령부, 주요 시에는 연대본부를 두고 예하 각 대대가 관할지역을 담당하면서 분견대를 설치했다.
따라서 역사적 배경과 경위가 어찌 되었든 일제가 물러난 지 한 달 여 만에 ‘해방’된 인천에서 미군에 의한 군정이 시작됐다는 것은, 그것이 미완의 해방에 불과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글쓴이 소개〉
▶인하대학교 사학과·동 대학원 문학박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초빙연구원, 국민대 공동연구원
▶현 국가보훈처 연구관, 인하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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