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성지, 참성단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19 08:55:23
민족의 성지, 참성단
김상열 송암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문헌상 우리 민족의 역사는 단군의 등장으로 출발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의 활동무대는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으로 단군 관련유적은 대부분 북한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그런데, 국조인 단군과 관련한 유적이 강화에 2곳이 있다. 하나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하던 곳으로 전하는 참성단(塹城壇)이고, 다른 하나는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게 하였다는 삼랑성(三郞城)이다. 남한에 유일하게 강화에만 위치하고 있는 단군 관련유적을 참성단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국조 단군의 인식
단군은 우리 민족과 역사를 인식하는 출발점이다. 고려시대 일연의 글에 등장했지만, 우리 민족이 단군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의 일인 듯 하다. 고려시대까지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은 불교다. 그러나 배불숭유를 정치이념으로 채택한 신진사대부들에게 있어 더이상 불교는 민족의 구심점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민족의 구심점으로 새로 등장한 것이 국조, 즉 단군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대동강 동쪽에 큰 무덤이 2개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단군의 무덤이라고 전하면서 단군이 뚜렷하게 인식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 참성단
# 참성단의 명칭
참성단은 『고려사』 지리지에 처음 등장하면서 각종 지리지와 사서에서 단군 관련유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참성대(塹城臺)·참성초단(塹城醮壇)·마리산초단(摩利山醮壇)·마니산성단(摩尼山醮城壇)·마리산 제성단(祭城壇)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려져 왔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인 명칭은 참성단이다.
그렇지만 참성단의 한자 표기도 塹星壇·塹城壇·參星壇 등 세 가지가 있다. 塹星壇은 가장 이른 시기의 문헌에 등장하는 표기인 반면에 參星壇은 영조대에 간행된 『여지도서』에 처음 등장하는 것이다. 별을 가리키는 한자어가 들어간 것은 참성단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별을 제사하던 곳이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참성(參星)은 서쪽에 있는 별자리다.
가장 적합한 표기는 塹城壇이다. ‘참호를 파서 쌓은 성에 있는 제단’이라 풀이할 수 있다. 물론 성종연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비로소 등장하기 때문에 시기가 너무 늦기는 하지만 가장 의미가 통하는 표기이다. 지리지나 사서에는 참성단 대신에 참성(塹城)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는 참성단의 약칭으로 이해된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의 지리지에는 참성에서 제사를 지낸 기록이 많이 전해지고 있어 참성이 종교적 의례가 거행되는 장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참성단실측도
# 참성단의 축조
우리는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하던 제단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조선시대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조선시대 이후 단군과 참성단을 연결하는 인식이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제사를 지내던 장소임을 밝히고 있지만, 단군과의 관련성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 이강의 시나, 목은 이색의 시에도 제단임은 긍정하고 있으나 축조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참성단과 단군이 서로 관련성을 갖게 되는 것은 언제부터일까.
참성단의 정확한 축조 시기는 알 수 없다. 참성단의 최초 기록은 풍수사인 백승현이 마리산(마니산) 참성에서 초제지내기를 건의해 왕이 제초를 거행했다는 『고려사』 원종 5년(1264) 5월의 기록이다. 이를 통해 참성단이 13세기 이전 어느 때인가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풍수사인 백승현이 왕에게 마리산 참성에서 체사를 지내게 할 수 있었던 것에서 당시 풍수사들이 국조 단군의 존재를 일찍부터 인식하고 단군 관련되는 곳을 길지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단군과 관련이 큰 평양을 중심으로 대국주의를 지향하는 묘청과 조위총이 난이 이어진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로 천도를 단행하면서 단군과 관련된 길지의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강화도인 것이다. 이는 백승현이 참성단과 삼랑성을 길지로 선전한 것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참성단인 단군과 연결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왕실이 강화로 천도하면서부터 풍수도참가들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참성단의 형태
『세종실록』 지리지에 돌로 쌓아 만든 참성단의 높이는 10척이고 위는 모나고 아래는 둥근데, 단의 윗면은 각 6척6촌이고 아래는 각 15척이라고 한 것에서 참성단의 형태가 상방하원(上方下圓)임을 알 수 있다. 즉, 원형으로 쌓은 하단 위에 방형의 제단을 두었다. 위의 네모난 것은 땅을, 아래의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늘 위에 땅이 놓여진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주역의 64괘 중에 태괘(泰卦)는 건하곤상(乾下坤上)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음양이 서로 교차하게 되면, 조화를 이루어 만사가 형통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 참성단중수비
그러나, 영조때 간행된 『여지도서』에는 단의 윗면을 7척6촌, 단의 높이를 17척이라 하고 있어 『세종실록』 지리지의 치수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접착제 없이 축조한 참성단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 자주 있어 이를 보수하면서 생겨난 차이로 보인다. 태종 11년과 세종 8년에 무너져 내린 기록이 있고, 인조 17년에 개수한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특히 숙종대 강화유수였던 최석항에 의해 전면적인 중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내용은 참성단의 동쪽 기슭의 가파른 암벽의 한 면에 새겨진 참성단중수비(塹城壇重修碑;인천시 문화재자료 13호)에 새겨져 있다. 중수비는 가로 50cm, 세로 105cm 크기로 비 윤관을 만들고 그 안에 8행 238자를 새겨 넣었는데, 주요 내용은 숙종 43년(1717) 5월에 당시 강화유수 최석항이 마니산의 참성단의 서북 양면이 반쯤 무너지고 동편 계단이 기울어져 있는 것을 보고 선도포별장 김덕하와 전등사 총섭 신묵에게 명해 보수했다는 것이다. 『여지도서』의 간행이 영조대이므로 최초의 기록과 차이가 나는 것은 참성단의 개보수가 자주 있었음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참성단 제사를 맡았던 천재암궁지
# 참성단의 의례
참성단은 고려와 조선시대 왕의 이름으로 국가에서 제사를 거행하던 장소다. 강도시대 원종이 직접 주재한 적이 있지만, 대부분 관리가 국왕을 대신해 제사했다. 이 때 파견되는 관리는 참성단행향사(塹城壇行香使)라 했는데, 왕의 비서인 대언(代言)이 파견되었으나, 세종대에는 2품 이상의 관리가, 성종대에는 4품의 관리가 파견되는 등 특별한 기준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행향사는 참성단 아래의 재궁(齋宮)에 머물면서 재숙(齋宿;재계하고 하루밤을 지냄)을 한 다음, 제의를 거행했다.
참성단의 제사는 정기적인 것과 비정기적인 것이 있었다. 정기적인 제사는 봄·가을에 거행되었는데, 제사의 목적은 기록에 전하지 않지만 국가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비정기적인 제사는 외적의 침입이나, 한발이 있을 때 수시로 거행되었다. 참성단은 국가제사가 행해지던 장소로 경비조달을 위해 제전(祭田)을 지급했다. 이형상의 『강도지』에 따르면 도교의 신들을 모시고 도교의례인 초제가 거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조선시대에 들어 폐지 논란이 일기도 했다.
참성단은 국조인 단군과 관련된 것으로 남한에서 유일하게 우리 인천만이 갖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그 중요성을 국가도 인정해 1955년부터 전국체육대회의 성화를 채화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매년 가을 7선녀가 성화를 채화하는 장면을 대중매체를 통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참성단에 대한 단편적인 문적사적 검토만 있었을 뿐, 재궁의 위치나 성의 존재 여부와 규모 등 가장 기초적인 자료조차 없는 현실이다. 더욱 구체적인 조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국조인 단군은 우리 민족의 구심점이다. 참성단의 연구와 더불어 단군의 연구도 보다 활발히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 자료제공 :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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