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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

조선왕실의 보장지(保障地) 강화도

by 형과니 2023. 4. 26.

조선왕실의 보장지(保障地) 강화도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0 00:00:54

 

조선왕실의 보장지(保障地) 강화도

배성수(인천광역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 왕실의 보장지 강화

 

 

글쓴이 배성수

 

 강화도와 교동도를 중심으로 하는 인천 연안은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삼국시대 백제와 고구려, 신라는 이곳을 두고 쟁패를 다투었고, 고려시대 이후 이 지역은 도성으로 향하는 수운의 길목으로서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곳이었으며, 지금도 이곳은 남과 북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접경지역 중 하나다. 이러한 사실은 이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인천 연안은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바다로 흘러가기에 앞서 합류되는 지역으로 한반도 중부지방 대부분이 뱃길로 연결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다.

 

더구나 강화도는 조수 간만의 차가 매우 심하고, 갯벌이 넓게 발달되어 있어 배를 정박할 만한 곳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예로부터 천혜의 요새로 인식되어 왔다. 고려 왕실은 이곳을 거점으로 약 38(1232~1270)동안 몽골의 침입을 막아냈으며, 임진왜란 당시 김천일 장군이 이끄는 5천여 명의 의병이 이곳에 웅거하며 행주산성 전투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까닭에 강화도는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부터 왕실의 피난처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실제로 인조는 1627년 후금의 침략(정묘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약 3개월간 머무르며 난을 피할 수 있었고, 이후 강화도는 조선 왕실의 보장지(保障地)로 인식되었다. 보장지는 국가와 왕실이 외침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피난해 그곳을 의지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거점을 의미한다. 조선 후기 강화도의 수비체제가 개편되고 많은 방비시설이 설치되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 , 보의 설치

 

 

문수산성 북벽

 

 강화도에 대한 방비는 인조 즉위 후 본격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했다. 정묘호란(1627) 때 강화도에서 머무르며 난을 피할 수 있었던 인조는 도호부였던 강화를 종2품의 유수가 다스리는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1629년에는 남양에 있던 경기수영을 교동으로 이전해 강화도를 중심으로 하는 인천연안의 해방체제를 구축했다. 북벌정책이 본격적으로 준비되었던 효종 대에 들어 강화의 군사조직은 보다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수군이 관할했던 강화도의 해안방어를 육군체제로 개편하면서 경기 서남부지역과 강화 주변에 있던 진, 보를 모두 강화로 이속시켜 훗날 12진보 체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 숙종 4(1679)에는 진무영을 창설해 강화도의 12진보를 지휘하도록 했으며, 그 수장으로 진무사를 두고 강화유수가 겸임하도록 했다.

 

 

강화도 외성 중 전성구간

 

 강화도에 설치된 진()과 보()는 모두 군사체제의 한 단위를 말한다. ()은 통일신라시대 변경의 방어를 위해 설치했던 지방의 특수행정구역으로 청해진, 혈구진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절도사가 관할하는 주진(主鎭), 첨절제사(僉節制使) 등이 관할하는 거진(巨鎭), 만호(萬戶) 등이 관할하는 제진(諸鎭) 3등급의 진이 있었다. ()는 고려시대 북방 변경지역에서 외적의 방어를 위해 설치했던 군사시설로 보루(堡壘)라고도 한다. 고려 정종 때의 무신 최충이 서북로병마사(西北路兵馬使)로 있을 때 영원진(寧遠鎭), 평로진(平盧鎭) 등의 지역에 14개의 보를 처음 설치했는데 조선시대에 들면서 진()과 혼용되어 사용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강화도에는 모두 12개의 진과 보가 해안선을 따라 설치되어 있었으며, 인근의 문수산성진까지 포함해 13진보라고 부르기도 했다. 진과 보에는 그 규모에 따라 종3품의 첨절제사, 4품의 만호, 9품의 별장이 진장(鎭將)으로 부임했으며, 각기 2~4개의 돈대를 관할하면서 주로 해안으로 접근하는 외적을 경계하고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 돈대와 성곽의 축조

 

 

망월돈대

 

돈대(墩臺)란 외적의 침입이나 척후 활동을 사전에 방어하고 관찰할 목적으로 접경지역 또는 해안 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의 방어시설물을 말한다. , 성을 쌓기 곤란한 지역, 특히 인접 돈대간의 교차사격이 가능한 지점에 축조해 외적에 대한 효율적인 방어를 가능하도록 했다. 대부분 근거리에 인접 돈대가 위치해 유사시 신속하고 정확한 연락체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숙종 5(1679) 병조판서 김석주(金錫胄)의 건의에 따라 강화도의 해안을 둘러싸는 48개의 돈대가 축조되었는데, 여기에는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의 승군(僧軍) 8천 명과 어영군(御營軍) 4300명이 동원되었다. 그 후 영조 1(1725)까지 5개의 돈대가 추가로 설치되어 조선후기 12진보 53돈대의 체제가 확립되었다.

 

 강화도의 돈대는 주로 동쪽의 염하와 북쪽의 조강을 따라 밀집해 설치되었는데 이를 통해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의 함락 이후 육지에서 강을 건너 강화로 침투하는 외적에 대한 방어가 시급했음을 알 수 있다. 돈대에서는 경계와 방어의 두 가지 임무를 수행했다. 해안선으로 적선이 접근할 경우 연기나 불을 이용해 이를 알리고, 총과 화살 및 불랑기 등의 화포를 이용해 외적의 접근을 저지했다. 평상시 병사 1명이 돈대에 상주하며 경계근무를 수행했으며, 유사시에는 인천, 통진, 연안, 풍덕 등지에서 투입된 병사들이 각 돈대에 배치되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돈대의 축조를 필두로 강화도에는 유사시를 대비한 본격적인 방어시설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고려시대 몽고에 장기간 항전을 가능케 했던 데에는 해안을 따라 축조했던 외성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에 힘입어 외성 축조의 논의가 이미 효종 때부터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결국 숙종 17(1691) 8월부터 본격적인 외성축조가 시작되었고 이듬해(1692) 5월 옥포에서 초지에 이르는 17의 토성이 완공되었다. 그 후 외성의 전 구간을 벽돌성[塼城] 또는 석성(石城)으로 개축했고, 축성구간도 연장해 현재 강화 외성의 흔적은 초지돈대에서 적북돈대까지 총 24에 달하고 있다.

 

 한편, 병자호란 당시 청의 군사가 문수산 정상에서 강화부의 병력을 정찰한 뒤 강화를 함락시켰기 때문에 강화도와 함께 문수산에 대한 방어도 함께 논의되었다. 문수산은 염하를 사이에 두고 강화도의 입구인 갑곶진과 마주하고 있으며, 정상에서 강화부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강화도 만큼이나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강화도 외성의 축조가 완공된 지 2년만인 1694년 문수산성의 축조가 시작되었다. 문수산성은 평지에서 해안선을 따라 쌓아 올라가 능선을 통해 정상을 감싸는 반원형 형태로 축조되었다. 문루를 모두 해안쪽으로 내고 강화도의 진해루와 마주 보게끔 했는데 이를 통해 염하를 통과하는 외적을 격퇴함과 동시에 강화의 방비를 견고히 하고자 했던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 적극적인 보장지 경영

 

 숙종은 진무영 설치를 통해 강화도의 방어체제를 완성시켰고, 각종 방비시설을 축조하는 등 적극적인 보장지 경영을 실시했다. 종래의 보장지는 단순한 피난처의 개념에 불과했으나, 당시 이러한 조치는 피난처에서 방어 및 반격이 가능하도록 모든 시설을 사전에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강화도에는 군사시설뿐 아니라 각종 국가시설도 설치되었는데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국가시설인 정족산 사고(史庫)’와 왕실의 도서관인 외규장각(外奎章閣)’ 등이 그것이다.

 

 한편 유사시 식량의 확보를 위해 간척사업과 목장의 농지화가 이루어졌다. 특히 숙종 32(1706)부터 2년간 실시되었던 선두포 축언사업을 통해 가릉포와 선두포 사이의 넓은 농경지가 조성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제방의 축조를 통한 농지의 확보는 강화도를 보장지로 경영하는 데에 빼놓아서는 안 될 중요한 정책 중 하나였다.

 

 # 방어개념의 변화

 

 영조~정조 대는 숙종이 이룩한 강화도 방위체제를 기반으로 내실을 정비하는 시기에 해당한다. 영조 4(1728)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계기로 도성사수론이 대두되었다. , 유사시 국왕이 도성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는 개념에서 백성들과 함께 끝까지 도성을 사수해야 한다는 개념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강화도의 전략적 개념도 보장지의 의미가 아닌 도성에서 가까운 지역방어의 중심지, ‘도성 방어의 전진기지로 변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국가 전반에 걸친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강화도 및 인천 연안에 대한 방어체제도 유명무실해졌으며, 결국 19세기 말 세 차례의 외침에 변변한 저항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 강화도 12개 진,

 →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선두보, 장곶보, 정포보, 인화보, 철곶보, 승천보, (문수산성진)

 

 ☞ 강화도 53개 돈대

 【월곶진 소속적북돈, 휴암돈, 월곶돈, 옥창돈

 【제물진 소속망해돈, 제승돈, 염주돈, 갑곶돈

 【용진진 소속가리산돈, 좌강돈, 용당돈

 【광성보 소속화도돈, 오두돈, 광성돈

 【덕진진 소속손돌목돈, 덕진돈

 【초지진 소속초지돈, 장자평돈, 섬암돈

 【선두보 소속택지돈, 동검북돈, 후애돈

 【장곶보 소속미곶돈, 북일곶돈, 장곶돈, 검암돈

 【정포보 소속건평돈, 망양돈, 삼삼암돈, 석각돈

 【인화보 소속무태돈, 인화돈, 광암돈, 귀등곶돈, 작성돈

 【철곶보 소속초루돈, 불장돈, 의두돈, 철북돈, 천진돈

 【승천보 소속석우돈, 빙현돈, 소우돈, 숙룡돈, 낙성돈

 【영문 직할분오리돈, 송곶돈, 송강돈, 굴암돈, 계룡돈, 망월돈

 

 〈※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