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인천의 문화재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0 00:09:06
조선시대 인천의 문화재
김상열 인천광역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 김상열 인천광역시 송암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문화재에 대한 법률적 정의는 “인위적이거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가적·민족적·세계적 유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경관적 가치가 큰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선조들의 문화를 영위하면서 만들어낸 소산 모두가 문화재인 것이다. 이러한 문화재 중에서 민족 정체성 규명에 중요한 것들을 국가와 광역자치단체에서 지정·관리하는 것을 지정문화재라 한다. 조선시대 인천의 지정문화재를 국방유적, 관청유적, 분묘유적 등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 보장처 강화의 국방유적
강화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인후지지(咽喉之地), 보장처(保障處) 등이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강화의 군사적 중요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시대 강화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국방유적이다. 임진년과 병자년의 양란을 겪은 조정에서는 도성 방어와 피난처로 활용하기 위해 강화도에 많은 군사시설을 설치했다. 효종이 북벌을 천명하면서 강화도에 설치하기 시작한 진보(鎭堡)의 설치는 숙종때 이르러 내성·외성·12진보·53돈대(墩臺) 등이 일
▲ 분오리돈대
단락되면서 강화도는 이중 삼중의 요새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세기 후반 두 차례의 양요와 운요오호사건을 겪으면서 군사유적이 초토화되었을 뿐 아니라 외국에 강제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급기야 국권을 상실하게 되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격동의 현장이었던 강화의 군사시설은 계속 복원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12진보 53돈대 중에서 현재 초지진(사적 225), 덕진진(사적 226), 광성보(사적 227), 용진진(기념물 42) 등 4개의 진보와 함께 갑곶돈대(사적 306호), 택지돈대(유형 33), 삼암돈대(유형 35), 분오리돈대(유형 36) 등 15개의 돈대가 지정·관리되고 있다.
▲ 강화 유수부 동헌
신미양요 당시 화력의 열세로 중상자 20여 명을 제외한 전원이 전사한 광성보에는 선열들의 충정을 기리기 위한 쌍충비각과 무명용사비가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4월 24일 어재순 이하 49명의 무사와 296명의 무명용사를 기리는 광성제가 봉행된다. 덕진진에는 조선시대 강화에 설치된 8개의 포대 중 가장 잘 복원된 남장포대와 흥선대원군이 세운 방수비가 남아 있다. 초지진에는 서구열강과 일본을 상대로 전투를 치르면서 포화에 맞은 흔적이 소나무와 성벽에 남아있어 약소국의 비애와 함께 격동의 시대의 긴박함을 느끼게 한다.
# 행정의 중심, 관청유적
▲ 인천도호부청사(복원)
인천광역시는 가깝게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인천도호부, 부평도호부, 강화유수부, 옹진도복부 등 4개의 전통시대 행정구역이 합쳐져 형성된 행정단위이다. 따라서 인천에는 행정, 치안, 조세를 담당하는 관청유적이 1개가 아니라 인천도호부청사(유형 1), 부평도호부청사(유형 2), 강화유수부 동헌(유형 25), 강화유수부 이방청(유형 26) 등이 존재하고 있다. 관청유적에는 향망궐배(鄕望闕拜)를 행하기 위해 궐패(闕牌)를 모셔놓은 객사(客舍)와 수령이 행정사무를 보는 동헌(東軒)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이 배치되어 백성들을 통치했다. 인천도호부청사의 규모를 문헌에 비추어 정리하면 객사(20칸), 동헌(10칸), 내동헌(33칸), 삼문(3칸), 공수(6칸), 사령청(9칸), 향청(13칸), 군관청(7칸), 훈무당(6칸), 옥사(4칸) 등 그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아는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강점한 이후 근대교육을 시행한다는 미명하에 넓은 터를 갖고 있는 관아터에 학교시설을 설치하면서 망실되었다. 인천도호부청사는 문학초등학교로, 부평도호부청사는 부평초등학교로 활용되면서 객사와 동헌 일부만이 남게 되었다. 강화유수부는 인근에 주거지가 형성되면서 동헌과 이방청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에, 인천시는 관교동에 인천도호부의 일부를 복원해 전통시대 행정기관의 이해를 도울 뿐 아니라, 각종 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 인천향교
전통시대 관청 옆에는 교육기관인 향교가 위치하는데 인천향교(유형 11), 부평향교(유형 12), 교동향교(유형 28), 강화향교(유형 34) 등 4개의 향교가 인천에 설치되었다. 향교는 강학(講學)과 배향(配享)의 기능을 함께 가졌기 때문에 명륜당과 동·서재로 구성된 강학공간과 대성전과 동·서무로 구성된 배향공간으로 이루어졌다. 명륜당은 교실, 동·서재는 기숙사의 역할을 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 유학자의 위패, 동·서무에는 한국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는 유림회에서 공자와 4성을 제외한 중국 유학자의 위패를 훼매하고 한국 유학자 18인의 위패를 대성전에 함께 봉행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행정 개편에 따라 부평향교와 인천향교가 합쳐졌다가 광복 후에 복구되기도 했다.
# 인천 명현의 분묘유적
▲ 김재로 묘
조선시대 인천 명현들의 분묘유적의 일부가 기념물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김재로묘(기념물 3호), 류사눌묘(기념물 5호), 영신군 리이묘(기념물 43), 한백륜묘(기념물 54) 등을 비롯한 인천관련 인물의 무덤이 문화재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분묘유적은 일반인들에 있어서는 무덤이라는 부정적인 관념과 함께 찾아가기 어려움 때문에 잘 찾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분묘유적은 인물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신도비와 묘지명 등의 금석문을 통해 개인과 시대상을 복원하는 자료로 활용되고, 석물의 배치·합장의 위치 등을 통해 당시의 장례제도 및 사후관념 등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 영신군 리이 묘
김재로는 영·정조대에 우의정을 지낸 인물로 아버지와 아들을 포함해 3대가 정승을 지낸 청풍 김 씨의 대표적 인물이다. 청풍 김 씨는 장수동 일대에 세거하던 인천의 명족 중 하나다. 이외에도 효령대군의 후손인 영신군 리이(李怡)를 비롯해 성종의 후손인 이선봉과 성종의 장인인 한백륜 등 왕실 관련인물들의 분묘유적과 함께 강화유수를 지낸 류사눌을 비롯해 이여발·조서강 등 문무 관직에 나간 인물들의 분묘가 지정·관리되고 있다.
분묘유적은 아니지만, 병자호란 당시 의병을 이끈 이윤생과 부인 강 씨의 정려(기념물 4), 인천의 대표적인 효자인 이찰·이율 형제의 정려(기념물 52)등이 지정되었으며, 인조 때 공신 심즙의 신도비(유형 32)와 윤순의 서체를 느낄 수 있는 적석사사적비(유형 38) 등 금석문도 있다.
# 청명한 가을 하늘과 함께 역사를 체험하자
이외에도 인천에 위치하고 있는 박물관에는 많은 동산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다. 강화역사관에는 사인비구라는 장인이 만든 조선후기의 대표적 범종인 강화동종(보물 11)을, 송도의 가천박물관에는 향약제생집성방(보물 1178)을 비롯한 고문헌 등의 동산문화재가 전시되어 있다.
올해는 유난히도 비가 많이 와서 맑은 하늘을 보기 어려웠다. 이제 청명한 가을 하늘을 만끽할 수 있는 풍요로운 계절이다. 온 산이 단풍으로 불타고 있는 가을, 가족과 함께 인천의 문화재를 탐방하면서 한민족의 구성원임을 느껴볼 때다.
〈※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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