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전후 인천의 연안방비책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0 21:06:02
개항 전후 인천의 연안방비책
배성수(인천광역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 개항 전후 인천 연안의 방비 목적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라 조선의 개항이 결정된 이후 제물포가 개항후보지로 부각되면서 조정에서는 인천 연안의 방비가 논의되었다. 이는 개항 후보지의 지형측량을 위한 일본선박의 무단 상륙에 대비함이고 궁극적으로는 인천의 개항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인천 연안에 방비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로 첫째, 이 지역이 강화에 못지 않은 보장중지라는 점, 둘째, 손돌목 등의 험로가 위치하는 강화수로를 경유하는 것보다 이 지역을 통해 도성으로 향하는 것이 훨씬 용이하고 거리상으로도 가깝다는 점, 셋째, 일본 측이 이미 인천, 부평을 거쳐 서울로 향하는 도로를 알고 있다는 점 등이 제시되었다.
▲ 화도진도
서해에서 도성으로 이르는 길은 강화수로를 이용하는 것과 해안에 상륙해 육로를 이용하는 것이 있다. 조선의 지형을 모르는 외국선박의 경우 수로를 이용해 통상을 요구해 왔고, 이러한 과정에서 프랑스와 미국의 함대가 이를 저지하려는 조선군과 강화도에서 격전을 치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강화도의 덕진진과 초지진, 통진의 덕포진에 포대를 설치하고 강화수로에 대한 방비를 강화했다. 그러나,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인들은 도성으로의 접근이 강화수로보다 훨씬 수월하고 거리도 짧았던 인천과 부평을 통하는 육로를 알게 되었고, 이러한 사실은 조정에서 근심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일본과 조약을 맺고 개항을 합의했다고는 하지만 조선은 일본의 의도를 불신하고 있었다. 만일 일본 측이 합의를 무시하고 무력시위를 할 경우 방비시설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던 강화도와 통진에 비해 인천 연안지역은 상대의 무력에 대해 무방비상태였다. 더구나, 1875년 일본군함 운요오호에 의해 영종방어영이 함락당한 상황에서 인천연안을 방어할 군사력은 전무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일본 이외에 다른 나라와는 어떠한 조약도 체결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 측의 육로 이용 정보가 서구열강에 흘러든다면 또 다른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천·부평연안의 방비 강화는 서해로부터 도성으로 향하는 육로를 차단해 일본을 비롯한 서구세력에 의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 화도진과 연희진의 설치
▲ 화도진
1878년 8월 27일 고종은 어영대장 신정희를 공역감동당상(工役監董堂上)에 임명해 인천과 부평의 해안에 포대를 설치해 방비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인천 연안의 방비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먼저 인천 제물포에 포대가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포대 축조에는 석질이 좋고 단단하다고 알려진 강화도의 석재(石材)를 채취해 사용했다.
1879년 7월 1일 인천과 부평 해안의 포대 설치가 마무리 되었다는 무위소의 보고가 있자 포대를 관할할 진을 설치했는데, 인천 제물포에는 화도진(花島鎭)을 설치했고, 부평에는 연희진(延喜鎭)을 설치해 훈련도감과 각 군영의 훈련관(訓練官) 중에서 쓸만한 자를 두 진의 별장으로 부임케 했다. 또, 같은 해 11월 무위도통사 민겸호(閔謙鎬)의 건의에 따라 인근에 있는 1개 면을 각각 두 진에 소속케 해 독진(獨鎭)으로 삼았다.
화도진에 소속되어 있던 포대들은 모두 8개로 제물포 주변에 있던 묘도 북변포대, 묘도 남변포대, 북성 북변포대, 북성 남변포대, 제물 북변포대, 제물 남변포대와 인천의 남쪽에 있던 호구포대, 장도포대 등이다. 이들 포대들은 각기 2~8개의 포좌를 설치해 수로를 통해 상륙하는 외적의 선박에 대비하고 있었다. 화도진과 소속 포대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화도진도(花島鎭圖'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 연희진지 표지석
그러나 부평에 설치하였던 연희진과 소속 포대들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자료가 없어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연희진의 위치가 서구 연희동 247번지 근린공원 일대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구전에 따라 가정포대와 용두포대의 명칭 및 위치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화도진의 예에 비추어 본다면 연희진에 소속되어 있던 포대도 6~7개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인천 연안에 대한 방비에도 1880년 인천의 개항이 결정되자 화도진과 연희진의 기능과 역할이 쓸모없게 되었고, 급기야 1882년 6월 28일 연희진은 혁파하고 화도진은 훈련도감으로 이속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일본 및 외국선박의 상륙을 저지하고 연안방비를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설치된 화도진과 연희진은 창설된지 3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본연의 기능을 상실케 되었다. 각종 기록에 따르면 개항 이후 화도진은 연안방비를 담당하던 업무에서 개항장의 치안질서 유지 및 인천항을 통해 입국하는 외국인의 편의를 제공하는 등의 업무로 전환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중심성의 축조
▲ 중심성지
1882년 연희진이 혁파된 이후 부평 연안의 방비는 허술해 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해안에서 부평부로 진입하는 계양산 자락의 경명현(일명 징맹이 고개)에 중심성(衆心城)을 축조하기에 이른다. 중심성은 당시 부평부사였던 박희방(朴熙房)이 부평 부민들의 기부금으로 축조한 성으로 계양산 정상에서 경명현을 거쳐 맞은편 중구봉에 이르는 구간에 축조한 성이다. 중심성의 축조와 관련된 유일한 기록은 중심성사적비이다. 이 석비는 중심성의 문루에서 서쪽으로 약 20m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훼손이 심해 1949년 7월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이전했고, 이듬해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석비의 재질은 오석(烏石)으로 높이가 5척(151㎝), 폭이 1.5척(46㎝), 두께가 0.8척(25㎝)이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비문을 확인할 수 있는 석비의 실체나 탁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 석비를 받치고 있던 귀부의 일부가 서구청 내에 보관되고 있을 뿐이다.
한편 1949년 10월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부평읍(계양산) 방면에 대한 고적조사를 실시하면서 보관 중이던 이 석비의 비문을 필사해 첨부했다. 인천시립박물관에서 간행한 '인천고적조사보고서'에 수록되어 있는 중심성사적비문 필사본은 1949년 10월 12일 이경성에 의해 일괄 작성된 '부평읍(계양산)방면 고적조사서' 27쪽~28쪽에 수록되어 있는데 비문을 직접 보면서 필사한 것이 아니라 탁본이나 1차 필사본을 원고지에 옮겨 적은 것이다. 기록된 글자는 총 279자로 제자(題字)가 6자, 본문이 184자, 감동좌목(監董座目)이 89자다.
비문에 따르면 부평도호부사 박희방(재임기간 : 1883. 5. 5~1884. 1. 9)은 1883년 9월 29일 조칙에 따라 중심성을 축조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적비가 세워진 것이 10월이므로 공사기간은 1개월이 넘지 않는데 공사기간이 짧은 것은 대다수의 부민이 동원되었고 성 자체가 정밀하게 축조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자성(一字城)의 중앙부인 경명현 고개마루에 문루를 쌓았는데 문을 경명문(景明門), 누각을 공해루(控海樓)라 했다. 성의 축조와 아울러 서쪽에 장대(將臺)를 두어 병사들을 조련하는 곳으로 삼았다. 또한 군기(軍器)를 보수하고 해안의 포대에 병사를 재배치해 성을 방비하고자 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연희진이 혁파된 이후에도 부평 연안의 포대들은 해안 방어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고, 부평부에서 이들을 관할했음을 알 수 있다. 부평부사 박희방은 부민의 뜻을 모아 축조했다 해서 성의 이름을 ‘중심성(衆心城)’이라 했으며, 공사가 완료된 후 사적비를 세웠다.
#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의 설치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의 간섭이 심해지고, 조청상민수륙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에 의해 사실상 조선의 해방(海防)이 무력화되자 고종은 이를 극복하고 연해의 방비를 자주적으로 담당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되었다. 부평 연해의 관문으로 쌓은 중심성(衆心城)도 그 중 하나로 축성을 통해 부평지역의 해안방어 체제를 재정비하고 궁극적으로는 도성으로 향하는 육로를 차단해 유사시를 대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경기 서해안 지역의 해안 방어는 각 영문에서 나누어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관된 체제를 유지하지 못했다. 이에 대비하고자 1884년 1월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을 부평에 설치해 경기도 연해지방의 방비를 담당하게 했다. 기연해방사무(畿沿海防事務)에는 민영목(閔泳穆)이 임명되었고 그는 해안을 방어할 병사와 포군(砲軍)의 조련을 관장했다. 기연해방영의 영문(營門)을 부평도호부에 설치한 이유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헌기록이 없어 조금 더 자세한 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저간의 상황으로 유추해 볼 때 다른 연해 고을에 비해 도성과의 거리가 가장 가까워 중앙의 통제가 용이했다는 점과 경기와 양서지역에 이르는 관할지역의 중앙에 부평이 위치한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1885년 3월 서울 용산의 만리창(萬里倉)터로 기연해방영이 이설되기까지 부평지역은 경기, 황해, 충청의 수군과 육군을 통제하면서 경기 연안의 해방(海防)을 담당하는 전략적 기지로서 기능했다.
(※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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