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도시로의 변화(1)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0 21:08:01
국제도시로의 변화(1)
견수찬(인하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개항과 더불어 인천에는 많은 외국인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개항을 주도한 일본인을 비롯해 청국인, 서
▲ 견수찬(인하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구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적과 문화를 가진 이들이었으며, 대부분 조선과의 교역에 종사했다. 그러나, 개항 초기 인천항에는 대규모의 대외교역을 감당할 시설과 제도가 완비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각국과 교역하고 조선의 관문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항만과 교역을 뒷받침할 시설과 관세 제도의 확충이 시급했다. 이에 따라 여러 차례에 걸쳐 항만시설을 확장하고 감리서와 해관을 설치·운영함으로써 인천항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관문항이자 대표적인 대외통상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됐다. 오늘의 인천이 공항과 항만·경제자유구역을 통해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면, 120여 년 전의 인천은 항만과 해관 등 대외통상에 필수적인 물질적·제도적 요소를 확충해 가며 동아시아의 주요 통상항구도시로 발전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 감리서의 설치
▲ 초기 해관
인천항의 개항이 확정되고 1883년 4월 최초로 상업종사 목적의 일본인이 내항했으나 그 수가 아주 적었고 본격적인 개항은 같은 해 6월경에야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인천항에서 통상사무를 취급할 필요성이 생긴 것 역시 6월 이후의 일이었다.
고종 20년(1883) 8월 19일 조선은 통상사무를 취급하기 위한 기구로 감리서를 설치했다. 감리서는 인천, 부산, 원산 등 3개항장에 두었으며 개항장의 해관(통상) 사무를 관장했는데, 감리서가 설치된 직후부터 독립기구로서 통상사무를 관장했는지는 불확실하다.
대개 감리는 지방행정장관직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을 뿐 아니라 개항 초기에는 통상사무가 그다지 번잡하지 않았으므로 관아에서 그 지방의 행정사무와 함께 통상사무도 처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 27년(1890) 서기관을 증원시키기 이전까지의 감리서는 초창기의 기구이므로 부사의 직권 하에서 아직도 부사의 직무가 주임무이고 감리직은 부차적인 임무로 여기기 때문에 관아에서 적절히 처리하다가 비로소 독립된 직원을 별도로 두게 된 것이라 보기도 한다.
인천감리서 실무직원의 충원과정은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고종 21년(1884) 6월 30일에는 감리인천항통상사무 홍순학 외에 최명환·팽한주 등 서기 2명과 장부 임응진이 배속돼 감리사무를 보좌하고 있었다.
▲ 1926년신축한 세관건물
감리서는 갑오개혁의 지방제 개편에 따라 고종 32년(1895) 5월에 폐지됐으나, 개항장과 개시장의 사무적인 분량이 증가하고 타 기관과의 연관성이 증대했기 때문에 이 업무를 일반행정과 함께 처리하기란 불가능했다. 따라서 감리서가 폐지된 지 1년4개월 만인 건양 원년(1896) 8월 다시 감리서를 복설하고 대외통상사무를 일원화해야만 했다.
감리서 폐지기간 동안 인천부관찰사가 관장하던 인천항의 통상사무는 다시 감리서로 이관됐는데, 「각개항감리서복설관제규칙」에 따르면 감리의 임무는 각국영사교섭과 조계와 항내 사무 일체를 관장하는 것이었다. 주로 통상사무를 관장하던 과거의 감리보다 그 기능이 현저히 확대됐음을 알 수 있다. 통상사무 중심의 초창기 개항장 사무가 그만큼 번잡하게 됐음을 의미한다.
# 인천해관의 설치
해관(海關)은 수출입 화물에 대한 관세사무 등을 맡아보는 행정기관으로 오늘날의 세관과 같다. 해관에서 부과하는 관세는 국내 산업을 보호함과 동시에 중요한 국가재정수입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외국과의 통상관계에 있어서 반드시 수반돼야 할 문제다. 그러나 관세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지 못했던 조선정부는 강화도조약 체결 직후인 1876년 8월 소위 「조인희·궁본소일 간의 의정서」라는 각서를 교환함으로써 향후 7년간(1883년 6월 22일까지) 수출입물품에 대해 관세를 받지 않겠다는 서약을 일본과 맺고 말았다. 이로 인해 해관이 설치되는 1883년까지 조선은 무관세 체제 하에 놓여 있었다.
▲ 1960년대의 인천세관
일본의 교활한 수단에 의해 무관세무역을 인정해 버린 조선정부는 부산을 개항한 뒤에야 관세자주권의 중요성을 깨달아 관세의 설정을 당면 중요 정책으로 삼고 해관 창설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됐다. 이러한 노력으로 1878년 9월 3일 경상좌도 암행어사 이만식의 건의에 의해 부산 두모진에 해관을 설치하고 수입물품에 대해 15∼20%의 관세를 징수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일본 측의 무력시위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인천해관은 1883년 6월 16일 창설돼 업무를 시작했는데, 같은 해 10월 31일에는 원산해관이, 11월 3일에는 부산해관이 각각 업무를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관은 1878년 9월 29일 부산항에 창설된 두모진해관이지만, 생긴 지 3개월이 지나지 않아 1878년 12월 26일에 폐관됨에 따라 그 후 제일 먼저 세워진 인천해관이 사실상 우리나라 근대적 세관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개항 후 외국과의 무역이 증가함에 따라 수출입 화물에 대한 관세 사무 행정을 담당할 행정기관으로 해관의 설치가 시급했다. 임오군란(1882년) 후 조선 정부는 근대적인 통상 외교 문제를 담당할 인물의 추천을 청에 요청했고, 이홍장의 추천으로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왔다. 그는 해관의 창설을 착수해 1883년 1월 민영익과 더불어 청의 초상국에서 해관창설자금으로 21만 냥을 빌려오는 한편, 상해에서 해관업무를 담당할 해관원을 모집했다.
해관은 청국의 해관을 본받아 창설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창설 당시부터 청의 영향 하에 놓여 있었다. 특히 총세무사의 임명권을 청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갑오개혁(1894년) 때까지 청국해관에서 파견된 총세무사와 외국인 세무사들에 의해 관리 운영됐다. 인천해관은 현재의 중구 항동 파라다이스호텔 부지 동편에 설치됐는데, 창설 당시 인천해관의 초대 세무사는 영국인 스트리플링(A. B. Stripling; 薛必林)이었다.
해관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총세무사였다. 당시의 관세행정기관은 중앙기구로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과 총세무사가 있었고, 지방의 관세행정기관으로서 각 개항장에 감리와 세무사가 있었다. 해관의 관리체계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총세무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각 해관의 세무사에게 지휘 명령하든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각 항의 감리에게 직접 명령하는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인천해관은 설치 당시 1동의 건물이었으며, 그 관할구역은 경기, 충청, 전라, 황해, 평안의 5도였다. 1897년 10월에는 목포와 진남포가 개항함에 따라 그곳에 인천해관 지서를 설치했다. 진남포 지서는 1906년 인천세관과 분리되어 진남포 세관이 되고, 목포 지서는 1908년 1월 부산세관 소속으로 옮겨졌다. 이후 1924년 원산세관이 새로 인천세관의 지서가 되면서 그 관내에 있던 함경남도, 함경북도 및 강원도의 3도가 인천세관의 관할구역으로 편입됐다.
해관은 러일전쟁 중에 한국정부의 재정고문으로 고빙된 일본인 목하전종태랑(目賀田種太郞)이 1906년 1월 브라운 후임으로 총세무사를 겸임하게 되자 일본의 관세제도에 따라 세관이라 개칭하고 인천세관장도 일본인이 취임하게 됐다. 소정의 관세를 조선정부에 정직하게 납부했을리 만무하며 더더욱 마음대로 관세의 포탈과 농간이 용이했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 자료제공 : 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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