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옹 신태범'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8-03-29 15:24:51
의학박사 '한옹 신태범'
한옹(汗翁) 신태범(愼兌範·1912~2001) 의학박사.
신 박사는 인천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누구보다도 인천을 사랑한 `인천인'이었다. `인천 1호 의학박사'란 직함으로 40여년간 많은 인천 시민에게 `인술'을 펼쳤고, 중년 이후부터는 인천 근대사를 담은 각종 서적을 발간했다. 그러나 그가 인천에 대해 가졌던 애정만큼 지역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지난 10일 인천시 남동구 인천학연구소. `신 박사에 대해 취재하고 싶다'고 하자 김창수 선임연구원이 손때가 먹은 책 몇 권을 내놨다. 그러면서 “신 박사의 서적들은 인천 근대사를 가장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며 “그가 남긴 서적 몇 권 외에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다음날 인천문화재단 최원식 대표이사에게서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그는 “한번도 인천을 떠날 생각조차 한 적이 없는 분이었다”고 했다.
신 박사는 1912년 서울 관수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대한민국 첫 군함 함장인 신순성(愼順晟)씨이다. 신 박사는 6살때 아버지가 인천에 정착하면서 인천 사람이 됐다. 비교적 부유한 유년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제가 태어나기를 다행히도 중의 상쯤 되는 가정에서였어요. 그래서 서울 중류 가정의 상쯤 되는 그런 식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그 시대로서는 행운이었다는 것을 지금에 와서 고맙게 생각합니다.”(황해문화 1993년 겨울·창간호-원로를 찾아서 중)
대한민국 최초 국비 유학생으로 뽑힐 정도로 머리 좋기로 이름 난 아버지 영향때문인지, 신 박사는 `축현심상소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공립중학교'(현 서울고 전신)에 무난히 합격했다. 학업 성적이 뛰어나 경성중을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이후 `조선 사람은 의사가 돼야 일본인들의 간섭을 덜 받으면서 넉넉하게 살 수 있다'는 아버지 가르침을 따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183㎝, 90㎏. 당당한 체격을 가진 신 박사는 운동에도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대학생때 일본 동경에서 열린 `전국대학 빙상경기대회'에 3차례나 출전한 경험이 있고, 유도(4단) 선수로도 이름을 알렸다. 개업의로 활동할 때는 대학생때 틈틈이 익힌 야구 실력을 `전국 성인야구대회' 인천 대표로 출전, 뽐내기도 했다.
신 박사는 대학 졸업후 `순천도립병원'(당시 전라남도 소재)에서 외과과장을 지내다 1942년 고향 땅 인천으로 와서 당시 일본지계의 중심지인 `본정'(本町), 지금의 중구 중앙동에 병원 문을 열었다.
`신(愼)외과'. 일본 침략기에 그것도 일본지계에서 창씨 개명을 하지않고 자신 이름으로 병원을 낸 것이다. 그의 의술은 뛰어났다고 한다. 고일(高逸) 선생은 인천석금에 “신태범은 광복 4년전 인천에서 일본인 최고 권위자인 `서야입외과'(西野入外科), `목뢰외과'(木瀨外科), `산구(山口)병원'과 경쟁해서 우위를 점하였고, 1942년에는 인천의 한인으로서는 최초의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인재였다”고 적었다.
광복후 신 박사에게 정치에 입문할 기회가 찾아온다. 1945년 10월 신 박사는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과 처음 만난다. 죽산이 열개 손가락 중 여섯 개가 상한채 신 박사를 찾아온 것이다. 당시 인천에서는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 때문에 죽산의 손가락이 많이 상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신 외과에서 입원 치료를 통해 죽산은 완쾌했고, 이후 이들은 가끔 만나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때의 만남은 정치 성격을 띤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전문 직업인으로서 서로의 지식을 논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잠시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듬해 죽산은 좌익단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 인천지부 의장으로 선출되고, 신 박사는 부의장으로 선출된다. 신 박사는 이후 각종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죽산과 나는 이념이 달랐다”며 “부의장은 내가 원하지 않던 일이었다”고 했다. 신 박사의 부의장 선출 사실이 지역 신문에 소개되자, 인천 사회는 그에게 `공산당'이라며 손가락질했다. 신 박사는 한 달뒤 죽산에게 사표를 냈다. 죽산도 자신과 신 박사의 사표를 박헌영에게 내던지고 공산당 탈당을 선언했다. 죽산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신 박사는 1991년 MBC TV의 `잊을 수 없는 사람' 코너에서 “죽산이 농림부장관에 취임한 뒤 유능한 친구를 소개하라는 부탁에 동경일본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조동필을 소개했다. 조동필이 농림부 국장이 돼 초기 농림 정책의 시행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 후로 죽산과 인연이 끊어졌다”고 했다.
신 박사는 1954년 자유당으로 총선에 출마할 의사를 갖고 있었으나 공천을 받지는 못했다. 4년뒤 공천을 받아 총선에 출마했지만 아깝게 차점으로 낙선했다. 1960년 3월에는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인천시 갑구 지구당 총책으로 인천에서 이승만과 이기붕 후보 선거운동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부정선거를 한 사실이 속속 밝혀지면서 그의 정치인생은 최대 고비를 맞는다. `4·19 혁명'이 터진 것이다. 이후 신 박사는 `정계에 복귀하라'는 정치인들의 권유를 딱 잘라 거절했다. 정치와는 더이상 인연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신 박사는 책을 가장 큰 스승이요, 보물로 여겼다. 80살이 넘어선 뒤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조우성(광성고 교사) 시인은 “작고하시기 전에 찾아뵈었는데, 뉴스위크 영어판을 보고 계셨어요. 눈이 침침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아직도 책을 읽는게 가장 큰 낙이라고 하셨어요”라고 했다.
6·25동란 후 그의 글 재주를 탐낸 지역 신문사들이 줄줄이 칼럼을 써줄 것을 부탁했다. 신 박사는 1956~1957년 주간인천에 `전망차'(展望車), 1964~1965년 인천신문엔 `반사경'(反射鏡)이란 제목으로 각각 칼럼을 실었다.
80년대 초반 어느 날 한진그룹 회장이던 고(故) 조중훈씨가 신 박사를 찾아왔다. 신 박사가 병원 문을 닫고 지낸 뒤였다. 조 회장은 자신의 그룹에 소속된 대학(인하대학교)에서 교의(校醫)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신 박사는 이를 승낙했다. 2년여간 인하대에서 교의로 활동하다 인하대 총장의 권유로 `영양과 건강'이란 주제로 교양과목을 10여년간 맡아 강의했다. 신 박사의 강의는, 처음 개강할 무렵 몇 안되던 수강생이 3년뒤에 400명으로 불어날 정도로 `인기만점'이었다고 한다. 그는 학생들을 데리고 내장탕으로 유명한 동구 송림동 `아리랑관'을 찾아 내장탕을 함께 먹으며 인생을 논했다고 한다.
신 박사는 2001년 작고하기 전까지 인천 근대사를 담은 책들을 발간했다. 그 중 가장 높이 평가받는 것이 `인천한세기'다. 1983년 인천 개항 100주년을 맞아 경인일보에서 시작한 시리즈에 신 박사가 직접 집필한 글이 실렸다. 70살을 넘긴 고령임에도 신 박사는 직접 자료 수집과 현장 답사를 했다. 시리즈 하나하나가 모여 `인천한세기'란 이름의 책이 발간됐을 때, 신 박사는 `인천 최고의 향토사가'란 호칭을 얻게 된다. 신 박사는 인천한세기를 비롯해 `먹는 재미 사는 재미', `음식문화탐험', `개항후의 인천 풍경', `인천 중구의 옛 풍물' 등을 펴냈다.
신 박사는 자신의 지난 세월과 평가가 담긴 자료를 책으로 엮어 가장 아끼는 후배 중 하나였던 조 시인에게 건넨 뒤 2001년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회갑때 본인이 직접 지은 호 `한옹'처럼 끝까지 땀 흘리기를 마다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이다.
김장훈 cooldude@kyeongin.com / 2006.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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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100人·50] 인터뷰/최원식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직접뛰며 만든 '인천한세기' 수작"
“신태범(愼兌範) 박사는 진정한 인천사람이었습니다.”
인천문화재단 최원식 대표이사는 “인천의 최고 의학박사로, 때론 향토사가로, 그가 남긴 업적 모두가 인천을 위한 것들이었다”며 이처럼 말했다. “사람들과 만남을 가져도 대화 주제는 언제나 인천에 대한 것들이었다”고도 했다.
최 대표는 월미도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신 박사의 집을 떠올리며 “지인들이 돈과 명예를 얻어 인천을 떠났으나 그는 작고하기 전까지 인천을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최 대표는 신 박사의 책 `인천한세기'를 높이 평가했다. 앉아서 쓰는 작문이 아닌 현장을 직접 살펴 확인한 사실을 바탕으로 쓴 진정한 역사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는 “근대 인천사를 꿰뚫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신 박사가 만들었다”면서 “고일(高逸) 선생의 인천석금과 더불어 인천한세기는 인천의 근대사를 가장 잘 표현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최 대표는 또 인천한세기를 학술적 자료로 승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특히 “기억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 “역사를 잘 알아야 나라가 발전하듯, 신 박사의 서적들은 인천 발전의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 신순성부터 장남 신용석까지 신씨 3대가 인천 사회에 끼친 영향이 무척 큽니다. 신씨 가족사에 대한 재조명 작업도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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