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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관광,가볼만한곳

전류리 포구

by 형과니 2023. 4. 24.

전류리 포구

인천의관광/인천가볼만한곳

 

2008-04-03 12:21:36

 

전류리 포구

 

’. 눈앞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팽팽한 균형을 지켜보며 살았다. 그래서 삶은 고단하고 힘겨웠다. 멀쩡한 사지를 하고도 갈 데가 자유롭지 않았던 최전방 포구, 하지만 원망도, 한탄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연이 선택한 사람들에게 주는 쓴 선물이러니 하고 받아들였다. 밀물에 빈 배를 흘려보내고, 썰물에 만선을 거슬러 태우는 순치의 삶에는 자연의 달콤함도 있었다. 짠물도, 그렇다고 민물도 아닌 짭짤한 물기를 타고 올라오는 물고기들이 한 가득 안겼다. ‘황금어장’.

 

그 아슬아슬한 이 가져다 준 한강하구의 고요는 예고된 듯 깨지고 있다. 날카롭게 선 개발의 격랑은 전류리(顚流里)를 넘어 조강(祖江)의 바닥을 훑고 있다. 이제 지친 늙은 어부들은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통진’(通津)은 조강(祖江)이 먹여 살린다라는 옛말이 있다. 남북을 잇는 조강포에서의 교역이 그 만큼 많아서였다. 그 조강 언저리에는 작은 어촌마을이 있다. 강 건너 북한의 개풍과 마주한 한강하구의 마지막 남은 포구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전류리(顚流里). 강물이 거슬러 거꾸로 흘러서 붙은 이름이다. 지금의 한강하구를 있게했다. 바다의 밀물은 3시간마다 전류리 포구 앞으로 들이닥친다. 한강의 민물에 밀린 바닷물은 하루 9시간 썬다. 전류리 어민들은 바다의 밀물과 한강의 썰물이 맞부딪힌 정적의 순간을 이라고 부른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한 그 고요의 시간은 10여 분. 찰라의 순간이다. ‘이 깨지면 바다의 밀물은 거센 기세로 밀어닥쳐 지금의 서울 강남구 압구정까지 들이친다. 여울이 거세고 빨라 모든 것을 삼킬듯 솟구친다. 이때 전류리 어민들은 빈 배를 물살에 태운다. 한강 상류에 손바닥만한 어로구역이 있기 때문이다.

 

60여 년 전 김포의 물가에는 조강포, 신리포, 마근포 등 전류리보다 하류에 작은 포구 나루들이 촘촘히 있었다. 그러나 전쟁 후 남과 북이 나눠지자 이들 포구의 어민들은 모든 것을 접고 흩어졌거나 전류리로 모여들었다.전류리는 남녘의 최전방이자 한강의 최하류 포구다. 이 곳 포구에는 5t짜리 고깃배 5척과 1t의 조각배 69척이 있다. 선주 74명과 선원 28명이 전류리 포구에서 질긴 삶을 이어오고 있다.

 

계절마다 다양한 물고기가 잡힌다. 4월 보름부터 6월까지 황복과 웅어, 6월부터 9월 말까지는 농어, 8월 말에는 새우, 10월에는 뱀장어와 참게가 그물에 올라온다. 5t규모의 선박은 일명 꽁지배로 새우를 잡는다. 하지만 어민들은 포구에서 부터 눈앞의 어로한계선인 200m 지역에서만 어업이 가능하다.

 

10여 년 전만해도 노를 저어 강에 나가 물고기를 잡았다. 배에 동력을 달 경우 쉽게 월북할 수 있다는 염려에서였다. 전류리는 3년 전까지만 해도 잠을 못잘 정도로 크게 대북방송이 울려 퍼지는 등 긴장감이 감도는 곳이었다. 세월은 배의 진화를 가져왔다. 배에 15마력과 30마력짜리 엔진부착을 허락하다가 최근 60마력까지 허용했다.

 

전류리의 물은 얼굴이 훤히 비칠 정도로 맑고 깨끗했다. 쉬이 배에서 내리고 오를 수 없는 꽁지배선원들은 그 물을 퍼다가 밥을 해 먹곤 했다. 그러던 것이 일산대교와 김포대교, 행주대교 등이 건설되면서 상류에서 토사가 밀려와 전류리에 퇴적물이 쌓였다. 물길을 막은 고천면 신곡수중보 탓에 모래가 쌓여 강바닥이 급속도로 높아졌다. 전에 있던 물골도 메워졌다.

 

모래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푸른 물을 보지 못한 지 오래다. 어민들은 부유물이 가라앉지 않아 뿌예진 강을 개흙발이라고 부른다. 퇴적물 때문에 수심이 얕아져 배가 뜨기가 힘들 정도지만 장마철이면 하구가 막혀 물이 넘치기 일쑤다. 인근 서울시와 김포시의 개발 등 화공약품이 쓸려내려 와 악취가 코를 찌렀다. 밀려오는 개흙발로 배는 잦은 엔진고장을 일으켰다. 어종도 줄어 들었다.

 

15년 전까지만 해도 뱅어가 넘치는 곳이었다. 뱅어의 몸은 투명하고 눈만 검어 내장까지 다 비친다. 전류리에 뱅어공장이 있을 정도로 뱅어는 지천이었다. 하지만 지난해엔 십여 마리만 나타났을 뿐이다. 제대로 성장을 못하는 참게는 상품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여기에 최근 한강하구 개발 사업으로 모래채취 계획이 일자 어민들은 심난하기만 하다. 개발 광풍으로 모래가 일어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데다 상류에서 모래를 파면 하류는 개흙발이 돼 고기잡이가 더욱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김포시는 지난 1992년부터 고촌면 향산리 일대 매장된 모래와 자갈 등을 퍼올려 파는 한강골재채취판매사업을 직접 운영해 1998년 말까지 모두 227억원 이상의 수입을 올렸다.

 

전류리는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하는 한반도 대운하의 출발점이다. 신곡수중보에서 35.8하류에 용강갑문이 만들어지고 파주화물터미널 등 4개의 터미널이 들어설 예정이다. 대운하의 첫 관문인 용강갑문 예정지는 조강이다. 한강하구의 최전방 어장인 전류리 포구가 위기에 처해있다.

 

=박정환·조자영기자 hi21@i-today.co.kr

사진= 안영우 기자 dhsibo@i-today.co.kr

 

 

전류리 포구에서 만난 사람

어부 심상록 씨

 

어부 심상록(70)씨는 전류리에서 태어나 한번도 고향을 떠난 적이 없다. 주변 개발로 전류리가 변해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산 증인이기도 하다.

 

그는 17세때 처음 바다에 그물을 던졌다. 당시 2.5t 목선을 타고 온 몸으로 노를 저었다. 그물도 나무껍질을 삶아 만든 것이었다.

 

조강에 한번 그물을 던지면 목선이 가라앉을 정도로 물고기가 넘쳤어.” 철마다 다양한 물고기가 그물에 달려왔다. 황복, 웅어, 참게, 뱅어, 새우, 장어, 메기, 깨나리 등 팔뚝만한 것부터 손가락만한 것까지 한가득 이었다.

 

5월초~6월 보름은 복 중에서도 으뜸인 황복이 지천이었다. 조선시대 임금님 수라상에 오를 정도로 맛이 좋았던 4~5월 웅어도 진미다. 황복과 웅어 모두 양식이 불가능한 회유성 어류로 산란철에 조강을 찾는다. 뱅어는 가마솥에 넣고 팔팔 끓여 말리면 좋은 향내가 나 술안주로 그만이었다. 참게는 한 마리에 15천 원에 거래됐다. 당시 쇠고기 1근도 그 값이 나가지 않을 때였다.

 

잡은 고기는 궂이 시내로 내다팔지 않았다. 오히려 객이 찾아왔다. 당시 어민들은 연간 5천만 원을 벌었다. 심씨가 기억하는 조강은 그야말로 황금어장이었다.

 

그러던 것이 전쟁 후 강에 어로한계선이 그어지자 전류리 포구 아래쪽 200m에도 부표를 띄었다. 배에는 가로·세로 1m 크기의 빨간 깃발을 달아 군대의 통제를 받았고, 엔진도 달지 못했다. 월선을 막은 것이다.

 

80년대 말 한강에 수중보를 세우는 등 각종 개발이 일기 시작했다.

 

밀물때면 물이 엄청 세 서울로 배가 떠올라갈 정도였지. 지금은 물골이 메어져 물살도 약해졌어.”

 

수중보와 일산대교, 김포대교 등 각종 공사로 조강에 흙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유속이 느려졌다. 썰때 강 수심이 8m에 달하던 것이 지금은 조금때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토사가 쌓였다. 정화조를 거치지 않은 각종 오·폐수가 조강으로 흘러들어 집 창문도 열지 못할 만큼 악취가 심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웅어나 황복 등 회유성 물고기가 찾던 길목이 막혔고, 부유물로 인해 아가미도 막혀 버렸다. 물고기 종류와 크기는 급격히 감소했고, 어민들도 더이상 뱃일만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다.

 

최근 김포시는 전류리 포구 어민들의 1년 총 어획량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남북 화해모드가 진행되면서 수월한 개발을 위해 선박과 어업권에 대한 보상계획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어민들이 평생 피 땀흘려 가꿔온 터전을, 개발업자들은 고작 돈 몇 푼 쥐어주면 되는 곳인 줄로 알지. 안타까운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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