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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다시 인천과 우현(又玄)을 생각해 본다

by 형과니 2023. 4. 25.

다시 인천과 우현(又玄)을 생각해 본다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2008-05-12 11:09:43

 

다시 인천과 우현(又玄)을 생각해 본다

 

굳이 인천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말을 쓰지 않겠습니다. 그 말 자체가 옳고 그른지에 대한 논란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내 고장 인천이 낳은 선구적 문화예술인들의 삶과 업적을 살피고 기림으로써 인천의 힘을 확인해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탤런트나 가수, 개그맨 등 현대를 살아가는 다방면의 문화예술인도 만나보려고 합니다. 거기서 인천 문화예술의 지평을 보기도 하고 마르지 않는 샘물을 길러 올린다는 포부도 안고 있습니다. 다시 듣는 고동소리! 비상(非常)한 이 시대에 우리 삶의 방식, 우리 문화 의식을 가늠하는 신호로써 이 인천문화예술인을 찾아서는 작동할 것입니다. 편집자 주

 

 

김윤식(시인)

 

 이 고장의 많은 사람들이 언필칭(言必稱) 문화 예술의 척박함을 탄()하는데 참으로 잘못된 이야기다. 제 사는 인천은 속속들이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먼 데만 바라보는 소치가 아닐까. 다른 사람은 두고서라도 우현 고유섭(高裕燮, 19051944)이 있는데 어찌 이런 말이 쉽게들 나올 수 있는지. 널리 알려진 대로 조선 미술의 줏대를 세운대 미학자(美學者), 미술사가(美術史家)이면서 문학인 우현이 태어난 인천에서 어찌 이런 소리를!

 

 인천 문화 운동사의 첫 장은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문예부에서 열었다. 한용단의 어머니 격인 친목회는 인천의 문학청년을 아들로 탄생시켰던 셈이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운동 경기를 내세웠으나, 독립 정신을 바탕으로 한 민족 문학 운동을 펼쳤다. 정노풍(鄭盧風), 고유섭(高裕燮), 이상태(李相泰), 진종혁(秦宗爀), 임영균(林榮均), 조진만(趙鎭滿)과 필자는 문학 동호인으로서 습작이나마 등사판 간행물을 발행했었고.”

 

 이 글은 인천의 원로 기자였던 고일(高逸)의 저서 인천석금윤문본의 일절이다. 경성제대를 다니던 청년 시절 우현의 생각과 문학 활동을 보여준다. 물론 그보다 앞서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보성고보에 입학해 처음 기차 통학을 하던 무렵의 회고를 보면 그의 문학적 성향이 어떻게 싹텄는지 일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현이 훗날 정적(靜寂)한 신()의 세계라는 수필에 고백해 놓았다.(2006년 인천문화재단 발간,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서 재인용)

 

 

우현 고유섭 선생 유영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16~17년 전 중학에 처음 입학되던 해 차 속에서 매일같이 읽던 톨스토이의 은둔이라는 소설의 기억이다. 그때, 어느 상급학교에 다니던 연장(年長)이던 통학생은 내가 조그만 일개 중학 1년생으로 이런 문학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 매우 건방져 보였던지 또는 부랑스럽게 보였던지는 모르나 그것을 읽어 아느냐는 물음을 받던 생각이 지금도 난다.”

 

 경성제대 예과 시절 우현은 오명회(五明會), 문우회(文友會) 같은 서클에 가담해 활동한다. 본과에 진급해서는 주로 문우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이 시절 동아일보와 문우』 『조광(朝光)에 발표한 시조와 시, 수필이 남아 있다.

 

 <부평하경(富平夏景)>

 청리(靑里)에 백조 날아 그 빛은 학학(鶴鶴)할시고

 허공중천에 우즐이 나니 너뿐이도다

 어즈버 청구(靑邱)의 백의검수(白衣黔首) 한 못 풀어 하노라

 

<염전추경(鹽田秋景)>

 물빛엔 흰 뫼 지고 고범(孤帆)은 아득하다

 천주(天柱)는 맑게 높아 적운(赤雲)만 야자파(也自波)

 어즈버 옛날의 뜻을 그 님께 아뢰고저.

 1925년 동아일보에 실렸던 8편의 연시조 경인팔경(京仁八景)중의 일부분이다. 이 나라 문학사에 길이 남을 절창(絶唱)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 글을 놓고 인천사람으로서 그의 곡진한 애향심의 발로라고 하면 지나친 억지일까.

 

 우현은 1905년 인천시 용동에서 부친 고주연(高珠演), 모친 평강 채씨(蔡氏) 사이에서 맏아들(실제로는 둘째였으나 형이 유년시절에 사망했다고 전한다.)로 태어났다. 누대에 걸쳐 인천에 거주한 것은 아니고 조부대(祖父代)에 서울 용산에서 이주해 왔다. 조부는 고용인을 두 명 거느린 상인으로 알려져 있다. 우현의 부친은 서울 관립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1904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동경 제일고등학교에 유학한 우등생이었다. 이 학교를 졸업한 뒤 부친이 진학을 결심한 학교는 동경제대 철학과였다. 그러나 후일 조선 총독이 되는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민족 차별 정책 때문에 진학을 포기하고 귀국한다.

 

개성 현화사비 조사

 

 하지만 우현의 집안에 그와 같은 철학의 피는 면면히 흘러내렸다. 동경제대 철학과에 뜻을 두었던 부친. 그리고 경성제대 문과 제2기생으로 입학해 1927년 법문학부 철학과에 진학해 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한 우현. 그리고 그의 둘째딸 고병복(高秉福) 여사가 다시 서울대 미학과를 나와 오늘날까지 활동하고 있는 것. “그 모두 다 하늘이 그렇게 한 일일 것이다.”

 

 숙부인 고주철(高珠徹)은 광복 후 인천 최초의 일간지 대중일보의 창간에 간여한 유지요, 중구 경동 애관극장 앞에 병원을 개원했던 인천의 저명한 의사였다. 우현의 장인은 정미업자로서 이른바 당시 인천 부호 10위 안에 들었던 이흥선(李興善)이었다. 이흥선 역시 당시 인천의 전문 문예운동단체인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를 후원하고 대중일보의 발간을 지원하는 등 사회사업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1938년에는 최승우(崔承宇), 김세완(金世玩), 유군성(劉君星), 장석우(張錫佑) 등과 현재의 동산중고등학교의 전신인 인천상업전수학교를 설립했다. 동산학교 설립에도 관여한 연고로 1974년 동산학원 이사장에 취임하기도 했다.”인천시사의 기록이 그의 그런 면목을 설명한다.

 

 

우현 고유섭 선생 동상 건립문

 

 고유섭의 생애는 채 40년에 이르지 못한다. 이 땅에 전인미답의 학문이었던 미학·미술사학을 처음으로 연, 그리고 그 기간이 불과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부임하기 직전부터 10년 남짓한 동안이다. 이 기간에 150여 편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으니, 앞에도 없고 뒤에도 오지 않을 실로 거대한 학문적 업적이 아닐 터인가.

 

 그의 저술 가운데 지금까지 책자로 간행된 것이 송도고적(松都古跡)』 『조선탑파의 연구(朝鮮塔婆硏究)』 『고려청자(高麗靑瓷)910권이 있으나 수많은 저술이 아직 미간행 상태로 있다.

 

 또 한편 알려진 대로 학자 우현은 행복하기도 한 분이었다. 바로 송도 3(松都三人)을 얻었기 때문이다. 개성박물관장인 우현의 미술 연구와 고적 조사의 의미에 감명 받은 개성 출신 3인이 스스로 문하가 되었던 것이다. 동경제대 경제학부를 다닌 황수영(黃壽永), 메이지대학에서 역시 경제학을 전공한 진홍섭(秦弘燮), 그리고 최순우(崔淳雨)가 그들로서 스승 우현이 기원(起源)한 한국 미술사학의 거리를 어언 80년에 이르게 한 것이다.

 

 

고유섭 선생 유필

 

 도대체 인간 고유섭의 인품이 어떠했으며, 미술사학이 어떤 학문이었기에 이들 남아가 다른 길에 일생을 걸게 한 것일까. 거기에 또 한 명, 인천시립박물관을 건립하고 이화여대, 홍익대 박물관을 설립한 인천사람 이경성(李慶成)을 이끌어들인 은 무엇이며.

 

 우리가 짐작하는 우현은 늘 조용조용하면서, 무겁게 열혈을 눌러 다스리는 단아하면서도 진중하고 또 강직한 학자요, 선비요, 애국자일 터이다. 그러나 일상인으로서는 모든 게 서툴 뿐으로 쓰라림도 적지 않았던 듯하다. 1941년의 일인지 모른다. 부인의 일기에는 썩은 고추사건이 나온다.

 

 박물관장이었지만 급료는 박봉이라고 당시의 자료들이 전한다. 그래서 여러 식구 건사하기가 힘에 부쳤던지, 우현은 부인 몰래 장인인 이흥선 옹에게 돈을 빌려 박물관 인근 장()모 씨의 아우로 하여금 중국 북경에 가서 고추를 사오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심부름을 맡은 그 사람이 중국인에게 속은 실수였는지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만 썩은 고추를 들여오다가 인천세관에 걸린 것이었다. 고추는 전량 세관으로부터 폐기 처분 명령이 나고, 거금이 걸려 있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를 치르는 와중에 부인에게 들통이 나 버린 것이다.

 

 부인 이점옥(李点玉) 여사는 일기에서 어쩌자고 내 몰래 갖다가 저리 큰 손해를 보고도 마음 편안하냐고 하고,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냐고 몹시 몰아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일로 불쌍한 우현 선생은 그만 석 달을 앓아눕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30주기가 되는 해인 1974년 문무대왕(文武大王)의 해중릉(海中陵)이 내려다 보이는 경북 감포(甘浦) 해안에 그의 수필 제목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를 새긴 기념비를 후학들이 세웠다. 이 해 인천 자유공원에도 우현 추모비가 건립되고 시립박물관에는 우현자료실이 설치된다. 인천시에서는 생가 터 앞 동인천역 대로를 우현로로 명명하는 한편, 1992년에는 새얼문화재단이 나서서 시립박물관 뒤에 동상을 건립했다.

 

 이제 개성박물관을 닮은 기와집을 한 채 잘 지어서 우현기념관을 열고, 인천의 대학에 우현학(又玄學)’ 강좌를 열어 그 학문의 중심에 우리 인천이 자리를 잡는 일만 남은 것이다. 다시 인천과 우현을 생각해 본다. 인천이 우현을 낳았는데 무엇이 척박하고 무엇이 쓸쓸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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