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최초의 근대 유행가인 인천아리랑
20세기 인천 부평 대중음악
장유정 (단국대학교 교양교육대학 교양학부 교수)
인천 최초의 대중가요는 어떤 노래일까? 대중가요를 어떻게 정의하고 최초의 기준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대답은 달라질 것이다. 분명 근대 이후에 새롭게 등장한 노래를 대중가요라 할 텐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대중성'이라 할 수 있다. 즉 넓은 의미에서의 대중가요란 근대 이후에 '대중이 향유하고 즐기는 가요를 의미하는 것이다.
근대를 언제부터 볼 것인가는 개혁이나 개방과 무관하지 않다. 국내에서는 1894년에 있었던 갑오개혁으로 공·사 노비가 법적으로 노비 신분에서 해방되었으며, 이로 인해 근대적 의미의 서민'이나 '대중'이 출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갑오개혁은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대외적으로는 개항을 근대의 시작점으로 볼 수 있다. 자의든 타의든 개항은 다른 나라의 문물이 유입되는 것을 뜻한다. 대체로 새로운 문화는 외래의 문화가 유입되어 기존의 문화와 교섭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개항은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라 할수 있다. 1883년에 있었던 인천의 개항은 그 때문에 인천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개항 이후에 가장 널리 유행한 인천의 대표적인 노래는 무엇일까? 바로 인천 아리랑>이다. 이 노래는 당시 인천에서 널리 불렸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유행요'로 일본에까지 소개되었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로 있는 김연갑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서 유우빈호우치신분(郵便報知新聞)』 1894년 5월 31일자 3면에 실린 「朝鮮の流行謠(조선의 유행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굴했다. 신문에는 아리랑의 가사와 해설이 실려 있는데, “왜인(倭人) 등쌀에 나는 못 살아" 처럼 일본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 가사가 등장하여 주목된다.
인천 제물포 살기는 좋아도 왜인(倭人) 등살에 나는 못 살아
에이구 데구 귀찮고 성가시다 단둘이 살자꾸나 싫다 싫어
아라란 아라란 아라리요
아라란 아오루손 아라리야
신문에서는 노랫말과 함께 “산간벽지의 아이들이나 포구의 아이들까지도 입에 담고 있다”며, “조선인이 일본의 위력에 압도당하는 것을 원망하고 군주의 폭정을 비난해서 부르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하는데, 하나는 아이들까지 부를 정도로 널리 유행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노래가 이른바 '반일(反日) 감정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저항가요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인천아리랑>은 1894년에 도쿄(東京) 하쿠분간(博文館)에서 간행한 『신찬 조선회화(新撰朝鮮會話)』에도 등장한다.
인천 체시리 사, 살긴 좋아도
(번역: 인천 제물포 모두 살기 좋아도)
왜인에 할가에 나 못살아 흥
(왜인 위세로 난 못살겠네 흥)
애구 대구 흥
단 둘이만 사자나
애구 대구 흥 셩하로다 흥
아라랑 아라랑 아라리오
아라랑 알션 아라리아 (모두 슬픈 듯이 부를 것)
산도 싫고 물도 싫은데
누굴 바라고 여기 왔나
아라랑 아라랑 아라리오.
어학서인 『신찬 조선회화는 조선에 가려고 하는 일본인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조선어 회화 공부와 함께 습득할 수 있도록 만든 책이다. 홍석현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편찬한 이 책은 1894년 8월 27일에 초판이 나온 이래 1894년 10월 30일에 3판이 출간될 정도로 많이 팔렸다. 제 32 가(歌)'에 실린 〈인천아리랑>은 일본어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우리말 발음을 일본 글자로 표기했으며, 홍석현은 일본 글자로 기록된 우리말 가사 뒤의 괄호 안에 일본어 번역도 함께 소개했다.
이 책에 인천아리랑>을 수록한 목적은 일본인들을 미워하는 인천 사람들의 민심을 그들에게 미리 알려줘서 행동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담기 위해서이다. 이 책을 하버드대학교 옌칭 도서관에서 발견한 허경진이 소개한 아래의 의역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인천의 산은 아름답고
제물포의 물은 맑아
가서 산에도 읊조려도 좋겠네
가서 물에서 헤엄치는 것도 좋겠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마세요.
일본인이 뽐내며 으스대고 다녀서
유쾌하게 사는 것이 이미 어려워”
인천이 개항한 후에 수많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 때문에 일본인 중에는 조선어를 배울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홍석현은 그들에게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반일감정을 알려주는 차원에서 〈인천아리랑〉 등을 조선어 회화 책에 실었다. <인천아리랑>은 1904년에 일본군 조선어 통역 하시모토 데이수케(橋本有造)가 조선어로 번역하고 이범익(李範益)이 교정한 『신찬 일한회화(新撰日韓會話)』에도 다시 실렸다.
1912년에 일본 총독부가 우리나라에서 실시한 민요 조사에 의하면 인천아리랑>이 여러 곳에서 수집되었으며 이 노래가 인천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한동안 불린 것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 1923년 12월 1일자에서는 “인천 제물포 살기는 조화도(좋아도)~”로 시작하는 〈인천아리랑>을 인천지방에서 유행하는 동요로 소개하기도 했다.
<인천아리랑>은 몇 가지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비교적 이른 시기에 유행한 아리랑의 형태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실, 그 선율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아서 장담할 수 없으나 제목과 가사를 근거로 이 노래가 '아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내용이 당시의 세태를 사실적으로 드러내고 있어서 이후 음반 등에 수록된 대중가요 아리랑과 차별성을 드러낸다.
다음으로 <인천아리랑>은 인천 유행가 내지 대중가요의 근원이자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초기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효시가 어떤 것이라고 정설로 자리잡지 못한 가운데 그 최초로 몇몇 노래들이 거론되곤 한다. 예를 들어 카츄사의 노래>(1916년), 〈사의 찬미>(1926년), 〈낙화유수(강남달〉(1927, 1929), 유랑인의 노래>(1930), <황성의 적(황성옛터)〉(1932)과 같은 곡들이 신문, 음반, 자작곡 등의 다른 기준에 따라 대중가요의 효시로 거론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민간에서부터 나와서 널리 유행하되, 그 가사가 근대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노래 중에서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효시를 찾기도 한다. 바로 1894년 동학 농민운동 이후에 널리 불린 〈파랑새야>가 그것이다. 비유적으로 표현하기는 했으나, 동학 농민운동과 더불어 널리 불린 이 노래에서도 초창기 대중가요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를 연구하는 박찬호는 『한국가요사』 1(미지북스, 2009)에서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가장 먼저 언급하면서 한국 대중가요 역사를 기술하였고, 음악평론가 황문평도 '야화 가요60년사 (전곡사, 1983)에서 〈파랑새야>로 한국 대중음악사 기술을 시작하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새야 새야 파랑새야>가 한국 대중음악사의 가장 처음에 놓이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 처음으로 한 곡을 더 보태면 바로 인천아리랑>이 될 것이다. 인천아리랑>이 1894년에 신찬 조선회화』에 수록되었다는 것은 그 노래가 그 이전부터 유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 내용의 근대성과 핍진성은 이 노래가 당대 조선인의 마음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꼭 외국에서 유입되어야만 새로운 노래라 할 수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중성, 근대성, 핍진성이라는 측면에서 초창기 대중가요의 형태를 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의 새로운 내용을 담아 널리 유행한 인천아리랑>에서 초창기 대중가요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인천 대중음악사, 아니 한국 대중음악사는 이 노래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https://alzade.tistory.com/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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