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이름 '만석동'
仁川愛/만석부두 관련 스크랲
2007-03-04 16:09:57
소중한 이름 '만석동'
80년 2월 1일 오전.. 아침부터 진통을 시작한 우리 엄마는 혼자 네 번째 출산을 준비하고 있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 까지 혼자서 진통을 하다가 아기가 발부터 나와 동네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인근의 산파 집을 찾아가 저녁 9시경 나를 낳으셨다.
처음에 우리 엄마는 아들을 몹시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네 번째 딸로 태어난 날보고 많이 우셨다고 한다. 때문에 우리집에 아들이 태어나길 바라셨던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은 아빠가 정했던 '영아' 라는 이름대신 다음엔 꼭 남자동생을 보라고 내 이름을 '필남'이라고 지어주셨다.
아기 때 순하고 낯가림을 잘 하지 않았던 난 동네 어른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었다. 그때는 엄마, 아빠 세대의 젊은 부부가 많이 살았기 때문에 함께 아이들을 키우고 보살피면서 모두 한가족처럼 지냈던 것 같다. 동네에 내 또래의 아이가 많지 않아서 난 초등학교 전까지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과 보냈던 기억이 많다.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을 엄마, 아빠라 부르며 따라가 밥도 먹고 다니고 이웃집 나들이에 넉살 좋게 쫓아가서 더 신나게 놀았다고 한다.
많은 분들 중, 특히 더 생각나는 우리 할매, 예전 우리집에서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다 보면 가장 마지막에 자리 잡고 있었던 이웃집의 할머니시다. 내가 어렸을 적엔 분명 아주머니 나이 나이였을 텐데도 우리 언니들과 난 할매라 부르며 친할머니 집처럼 오갔다. 몇 년 전 소방도로 건설로 화수동으로 이사를 하셨지만 가끔씩 연락하며 우리집 대소사를 챙겨주시는 고마운 분이시다.
또 한 분.. 날 중학교 때까지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하시면서 "너희 엄마 다리 밑에서 사과 장사 하니까 찾아가"라고 놀리시던 아저씨도 계셨다. 지금 생각하면 딸 많은 집에 아들을 데려오지 설마 또 딸을 데려 왔을까하며 웃어 넘겼겠지만, 그 당시 어릴 땐 여린 맘에 훌쩍거리며 다리 밑을 서성이기도 했었다.
만석동엔 이처럼 기억에 남는 좋은 이웃도 많았고 또 좋은 놀이터, 놀이감도 많았다. 만석 부두가 모래 공장에 가면 공장 아저씨들 몰래 모래 언덕에 열심히 기어올라 모래 미끄럼을 타며 신나게 내려왔던 기억이 난다.
방학엔 지붕 위에서 밀린 여름 방학 숙제와 일기를 썼었다. 지금같이 높은 건물들이 없었던 예전엔 지붕 위에 오르면 자유공원과 만석부두가 훤히 내려다보여, 때때로 자유공원에서 불꽃놀이라도 하면 모두 지붕을 타고 다니며 '우와' 탄성을 지르며 구경했던 기억이 있다.
그중 만석동 최고의 놀이터는 역시 기찻길이었던 것 같다. 기찻길 옆 나무 창고에서 소꿉놀이를 하며 놀다가 기차가 지나갈 때면 기찻길에 낡은 대못을 올려둔다. 기차가 지나가고 나면 대못이 납작하게 눌려 멋진 소꿉놀이 칼이 됐었다. 기찻길 주변의 이름 모를 잡풀들을 뽑아오고 빨간 벽돌을 갈아 고춧가루를 만들어 손으로 대충 주무르며 훌륭한 소꿉 밥상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돌아보면 하나하나 지금의 나를 채워주는 소중한 기억들이다.
얼마전 새로 이사한 아파트 창문에서 내려다보면 예전 우리집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렸을 적 그 좁은 골목도 사라지고 이젠 예전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 만석동이지만 바라보고 있으면 따뜻한 이웃과 즐거운 추억들이 있는 소중한 우리동네라는 생각에 마음이 푸근해진다. <김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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