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서 시작된 철도의 역사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6-07 02:00:40
1899년 첫 기적소리… 잠든 조선 깨웠다
인천서 시작된 철도의 역사
1899년 9월 18일 오전 9시 서울 노량진역.
'화륜거(火輪車)'라고 불리던 미제 증기기관차 '모갈 1호'가 인천을 향해 운행을 시작하며 첫 기적소리를 울렸다. 아시아에서는 인도(1853년), 일본(1872년)에 이어 세번째로 이뤄진 일이었다.이 날을 기념해 9월 18일이 '철도의 날'로 지정됐고, 인천에서 시작된 철도의 역사는 108년을 이어오고 있다.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 인천역 2차기공식 모습.
1876년 '수신사(修信使·외교사절)'로 일본에 파견된 김기수(金綺秀)는 이듬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기차를 소개했다.
그는 일본에서 본 것을 토대로 '일동기유(日東記游)'를 썼고, 이 견문록은 기차를 화륜거(불을 내뿜는 수레)로 명명하고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차마다 모두 바퀴가 있어 앞차의 바퀴가 구르면 뒤차의 바퀴도 따라서 구르게 되니 우레와 번개처럼 달리고 바람과 제비같이 날쌔더라. 한 시간에 300~400리를 달린다고 하였는데 차체는 안온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다만 좌우의 산천초목, 가옥, 인물이 보이기는 하나 앞에서 번쩍 뒤에 번쩍함으로써 도저히 잡아보기가 어렵더라."
당시 우리나라의 교통수단은 조랑말, 달구지, 돛단배, 인력거, 자전거 등이었다. 자동차는 아직 들어오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경인철도가 개통되던 당시 서울서 인천까지 가는데 소요시간은 도보 12시간, 수로 8시간이었다고 한다.
인천역에서 노량진역까지(33.2㎞) 기차 운행시간은 1시간30분, 평균속도는 20㎞/h였다.
◇ "기차를 타느니 걸어가고 말지."
경인철도 이용요금은 1마일(1.6㎞)당 2전5리였고, 노량진~제물포간 요금은 70전을 넘었다. 당시 여인숙에서 파는 한끼 밥값이 5전이었고, 짚신 한 켤레가 10전이었다. 하루에 40~50㎞ 걷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철도 대신 도보를 택했다.
의사이자 선교사로 조선에서 활동했던 미국인 알렌은 '조선견문록'에서 "평균 20명 내외의 승객이 이용했다"고 전했다.
비용문제 뿐 아니라 배일감정도 작용했다.
경인철도는 일본인이 부설권을 인수해 지은 '일본철도'라는 게 그 이유였다. 당시에는 '양귀는 화륜선 타고 오고 왜귀는 철차타고 몰려든다'는 동요도 나돌았다. 또 조선 중기 널리 퍼진 예언서 '정감록(鄭鑑錄)'에 기록된 '철마내시 한수빈(鐵馬來嘶 漢水濱)'이란 구절에서 나오는 '철마'를 기차로 풀이한 이들도 있었다.
'철마내시 한수빈'은 '철도 된 말이 한강에 와서 운다'는 뜻인데, 이 말은 조선왕조의 멸망을 예언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 말을 믿은 사람들은 기차가 기적소리를 내며 한강 위를 달리는 걸 좋게 보지 않았다. 승객확보를 위해 철도회사측은 신문에 광고를 내고, 각 역에서 호객행위를 했다. 곧 '철도의 효용'이 입소문을 타고 퍼지면서 이용객도 늘었다. 그리고 1907년 한해 철도이용객은 약 7만여명에 이르게 됐다.
◇ 경인철도 이야기
개통 당시 경인선에는 증기기관차 4대와 객차 6량, 화물열차 28량 등 모두 33량이 운행했다. 정거장은 인천~축현~우각~부평~소사~오류~노량진역 등 7개가 있었고, 직원은 119명이었다. 운행은 오전과 오후 모두 2차례 왕복했다. 기차는 1대의 증기기관차가 3량의 객차를 연결해 운행했다.
객차는 외국인(1등), 내국인(2등), 부녀자(3등) 전용으로 활용됐다.
1900년 7월 8일에는 난공사로 불리던 한강대교가 준공됐고, 같은 해 11월에는 서대문역이 개통됐다. 이로 모두 41㎞에 이르는 경인선 서울~인천 구간이 완전 개통됐다.
김명래problema@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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