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기상대는 어떻게 생기게 되었을까?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7-11 09:23:41
인천기상대는 어떻게 생기게 되었을까?
인천기상대의 생성은 104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04년, 우리나라는 힘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나라를 서로 차지하기 위한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 다툼으로 러일전쟁이 발생하였습니다. 일본군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군사작전에 날씨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1904년 3월 5일 일본 중앙기상대 내에 임시관측소를 부산, 팔구포(목포), 인천, 용암포(평안북도), 원산(함경남도)에 설치하였고, 인천에서는 4월 10일부터 하루 6회 관측이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러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일본의 임시관측소로서 외국기관에 의한 관측이었지만 경성, 대부, 부산, 목포, 강릉, 평양, 용암포, 원산 등 13개 지역의 측후소는 물론 중국의 만주, 대련, 천진, 청도, 제남 측후소까지 통괄했으며, 일본 중앙기상대, 영국 런던의 그리니치천문대와도 기상정보를 주고받았습니다.
1948년 국립중앙관상대가 서울로 이전될 때까지 국내․외 기상정보를 수집하여 그날그날의 기상을 분석하고 예보했던 우리나라 기상업무의 중추적 역할을 해온 뜻 깊은 곳입니다.
6.25동란으로 서울이 함락되고 중요 관측시설이 파괴되어 우리나라 기상업무기능을 수행할 수 없어 임시적으로 휴전 후 1953년 11월 서울로 이전될 때까지 인천에서 기상업무를 다시 수행하였다.
한국사연표에는 1884년 7월 부산 일본전신국에서 기상관측을 시작했다고 표기돼 있지만 근대적이고 체계적인 관측을 시작한 것은 인천관측소라는 것이 정설이라고 합니다.
또 일본이 1900년 인천 중구청 뒤 송학동에 있던 옛 수진여관 자리에 기상사무소를 개설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어 이것이 정식 기상대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산 정상에 2층 목조 건물로 69평 규모로 세워진 인천관측소는 국내는 물론 세계 각지의 기상정보를 수신해 그날 그날의 날씨를 분석하고 예보하는 중앙기상대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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