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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바다 보며 꿈꾸던 송학동 층층대길

by 형과니 2023. 5. 11.

바다 보며 꿈꾸던 송학동 층층대길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7-21 10:32:18

 

바다 보며 꿈꾸던 송학동 층층대길

/흐르고 싶은 인천-길에서 묻다/ 흔적들3

 

공립병원이 있던 자리는 연립주택이 들어서서 멋없이 변했다. 대문도 없이 적벽돌 담에 아치까지 세워 참 운치를 더했던 정원도 있어 병원이었다기 보다는 어느 고관대작의 공관과도 같은 모양새, 후로는 '인천원'이라는 화식과 한정식을 겸한 방석 깔고 앉는 집으로 변했건만, 참 그런 곳이 자그마한 박물관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친김에 층층대길을 좀더 올라가보자 맞은편에 자리 잡은 철조망이 높았던 집을 지나치려면 좀 움찔했다 싶은 인천경찰서장의 공관, 사복입은 경찰들이 도열한 것을 가끔 보던 어린시절 공연히 발걸음이 빨라져 층계를 서너 개씩 뛰어넘던 길 삐죽집은 참으로 멋있었다. 후에 역사에 조금이나마 길들여진 후 오례당 하우스를 알았지만 군사정권 방첩대가 난데없이 들어와 왜 불질러 먹었는지 지금까지도 이해가 안 된다. 아쉽다. 그 건물이 어떤 건물인지 몰랐단 말인가. 썩을 놈의 인간들.

 

오례당(吳禮堂)의 포르투갈 처와 조카사이에 재산분쟁 후 30년대 상공회의소장(일본인, 吉田秀次郞)의 주택으로 사용타가 미군 장교숙소, 방첩대가 점유하던 중 소실되어 빌라가 들어선 지금 품새 없는 길이 되어 버렸다.

개항기 외교관, 사업가들의 저택이 즐비했던 송학동 그러나 이 층층대길은 꿈을 보여준 길이기도 하다. 오르내리며 계단에 앉아 바다 쪽을 보며 길게 들이마신 숨, 품어내며 말끔히 가신 마음의 상처. 그렇다. 상처받은 건 살아 있음의 징표 아닌가.

 

그 길의 끝 좌측 집, 인천의 문학사에 언급이 됐고 흑인시만을 썼던 배인철의 집(?), 정확한 이야기론 배인철 시인의 맏형(배인복, 작고)이 돌아가시기까지 살았던 집이며 '우련통운'(배씨 가문에서 운영하는 통운업체, 현 신포동 사무소 뒤 소재)을 운영하는 현 회장(배인흥)은 바로 배인철 시인의 동생, 그리고 인하대 법대 교수를 역임한 배경숙씨는 여동생이다. 예술 문화의 터전을 일구기 위하여 쏟아냈던 정열의 시인, 그도 경제적 뒷받침이 없다면 택도 없는 일. 그런가보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을 버틴다'는 말이 아직도 '우련통운'을 가솔들이 경영, 굳건하다면 이해가 가고 남는 일.

 

걸을 때 다가오는 모든 사람은 그의 리듬에 의해 내 몸으로 체감된다.

 

근대화를 속도의 문제로 환원시켜 가는 길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되돌아오는 길은 인문(人文)이며 인문(人紋)으로 그래도 사람의 무늬를 살피고 헤아리는 공부도 흐르는 역사이며 옆으로 선 집들은 바뀌어온 주인의 의식 속에서 관심을 낳고 느끼면 그 자체가 하나의 완성된 또 다른 역사이다.

 

다리의 힘이 풀려 내려오는 송학동, 존재론적 차원에서 본다면 소외(疎外)되었다 소내(疎內)되는 듯하여 그나마 다행스런 동네지만, 역사복원의 노력은 좋으나 정확한 고증과 연구검토없이 실행한다면 그 또한 아니 감만 못한 짝퉁을 만드는 것 아닐까.

 

옛날 옛적에는 정말 소나무와 학이 있었으며 노닐던 곳일까만 한줌 그늘을 줄 수 있는 가로수 한그루 없는 그 곳을 일인(日人)들은 왜 산()의 손()이라 했을까.

 

다비다모자원(인천좌 혹은 대실러의 저택, 현 인성학원 터)이 있던 홍예문 길로 들면 육풍과 해풍이 낮 밤으로 지나며 지계(地界) 바깥쪽 우리 민()들을 시원하게 하던 응봉산 길, 아니구나. 홍예문 2길 관동2, 예총경기도 회장(68, 69년도)을 역임한 서예가 동정 박세림 선생의 생전 자택을 지나니 향을 사르고 싶구나. 맞은편 인천일보(사동시절) 편집 부국장을 역임한 조한길 선생의 제씨집을 보니 답동 육교에서 있었던 불미스런 비명횡사, 눈에 선하여 슬프구나.

 

선구지길 옛 번지로 말하면 관동33번지 길, 전편에서 언급이 됐던 편운 조병화 시인의 집, 산부인과 병원을 지나보자.

 

'흐르고 싶은 인천', 과거의 샘물에서 현재의 옥수를 떠 올려 미지의 문화 세계를 만들고자 뉘앙스를 떠올린 본란의 끈적끈적한 흔적들 흐르는 물에 헹궈보자. 삼각형 지붕을 받치고 있는 이층 목조건물 '흐르는 물'이란 이름의 카페, 지금도 중년의 문인들과 젊은 문화인들이 자주 들러 담소하며 고전 음악에 심장고동을 가라앉히는 집이 "이준 산부인과"로 편운 선생의 부인이 50년대 중반 인천을 떠나기까지 운영했던 곳으로 까맣게 잊고 있음이 부끄럽고, 듣는순간 생경한 맛까지 있었으니 초기 인천문단을 이룬 편운 선생에게 참으로 죄송할 뿐, 난망 이었습니다. 왜정때 건물로 1층을 병원으로 쓰고 2층을 살림집으로 쓰였던 것 같은 이집은 아직도 원형을 그대로 안고 앉아 있으니 흔적 찾아 옮기는 발길 보람이 있구나.

 

2층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골목길 풍경을 보며 차창 같다고 (홍명희 시인 구술에 의함) 했던 님은 "인생합승" 시편을 낳았는가.

 

"활짝 개인 하늘 아래/경인가로 팔십 여리 잔잔한 기복/과수원 가지들이 손목을 흔들고/보리 밭 양지에 풀물이 든다"라고.

 

/김학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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