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인천상륙작전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9-04 12:26:08
다시 보는 인천상륙작전
기고
말로만 전해져오던 인천상륙작전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군에서 찍은 필름으로 치열했던 상륙작전의 생생한 실황은 먼발치나마 구경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영상에 불과했다. 세계 상륙전사상 가장 훌륭한 작전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천상륙작전은 꺼져가던 대한민국을 살려내는데 최대의 공헌을 한 작전이었다.
6월25일 새벽에 물밀듯이 밀고 내려온 북한인민군을 대적할만한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던 국군은 3일 만에 서울을 뺏기고 부산까지 쫓겨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UN군이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모두 부산 앞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절대절명의 처지에 처해 있었다. 다행히도 제공권을 장악한 UN군이 인민군의 진격을 소강상태로 빠뜨리고 보급로를 차단하여 전세는 호전될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결정적 타격을 가하지 않고서는 역전이 어려웠다. 이 때 UN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인민군의 퇴로를 끊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신중히 검토했다. 극비리에 이 작전을 검토한 유엔군사령부는 인천을 상륙작전의 대상지로 선정했다. 사실여부는 알 수 없지만 유엔군은 원산 또는 군산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는 마타도어를 비밀리에 흘렸다는 얘기도 있다. 이처럼 모든 작전계획을 완료한 맥아더는 1950년 9월15일 새벽을 D-데이로 결정한다.
이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261척의 상륙함대를 안내할 수 있는 등대를 밝히는 일이 중요했다. 등대는 팔미도 정상에 있다. 15일 0시에 불을 밝히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불을 밝히지 못하면 날이 밝은 다음 집중포화를 무릅쓰고 돌입해야 한다. 특공대는 6명으로 구성되었다. 한국군으로는 계인주 육군대령, 연정 해군소령 그리고 최규봉 KLO 고우트대 대장 등이 참가했다.
등대를 점령한 특공대는 점등장치의 나사못이 빠져 점화 불능상태임을 알고 기진맥진하여 엎드려 있던 중 우연히 최규봉의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나사못이었다. 하늘이 도운 것이다. 뛸듯이 기뻐한 특공대는 등대불을 밝히는데 성공했고 맥아더는 진격 명령을 내렸다. 작전 후 특공대원 중 미군들은 은성무공훈장, 한국군은 자유훈장을 받았다.
최규봉 KLO대장은 신분상 민간인이어서 본인의 희망에 따라 등대에 걸었던 성조기를 받았다. 최규봉은 그 후 미국 언론사의 끈질긴 유혹에도 막대한 대가를 거부하고 이 성조기를 1956년 맥아더원수에게 기증하여 역사적 유물로 남겼다. 맥아더는 친필서명한 감사장과 사진 등을 보내줘 사의를 표했다. 최규봉은 이러한 기념물을 모두 용산 전쟁기념관에 기증했다.
개인이 소장하기보다 수많은 국민들이 볼 수 있는 영원한 전시를 선택한 것이다.
그의 개인적인 희생과 역사에 기여한 공로를 기린 인천광역시에서는 2006년 1월11일 안상수시장이 직접 명예시민증을 수여하는 행사를 가졌다. 팔미도등대 현장에는 구상 시인이 직접 비문을 쓴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해군에서는 최규봉을 명예해군으로 위촉해 상륙작전의 단초를 열어준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이처럼 나라의 운명을 가름했던 인천상륙작전을 인천시와 해병대사령부가 공동으로 재연행사를 갖기로 한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큰 의미가 있다. 기념일은 9월15일이지만 금년은 추석과 겹쳐 미의회에서 상륙작전이 승인된 9월9일로 앞당겨 실시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노르망디 상륙작전 행사처럼 인천상륙작전 행사가 해마다 개최되어 국제적인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천광역시의 큰 결정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
/전대열 한국정치평론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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