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천이야기

해안동-살기위해 웃음 팔던 '영욕의 거리'

by 형과니 2023. 5. 13.

해안동-살기위해 웃음 팔던 '영욕의 거리'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9-10 00:17:58

 

살기위해 웃음 팔던 '영욕의 거리'

다국적 군에 몸 던졌었던 눈물자욱 남은 해안동은

개인의 가()가 아니라 우리의 아픈 표상이다

 

'승국문화재단'을 일군 터. 옛이름은 '신풍장'이라고 했다. 옆건물이 '위스키메리'

세상에는 길() 아닌 길이 있을까. 그 아닌 길은 정신세계에서의 길일 것이다. ()적으로 해서는 안될 몸놀림과 해서는 안될 정신적인 것, 생각의 길 아니고서는 첩첩산중도 동물이 지나갔거나 사람이 간 모든 곳은 길이며 길이 아닌 곳이 없다. 길이 처음 생겨난 것도 동물이 지나간 길, 그리고 그 뒤따라 사람이 다님으로해서 생긴 것이다. 즉 원시사회에서 동물을 사낭하며 뒤따라 가다보니 생겨나게 된 것, 이렇게 길은 마련된 것이다.

 

여행을 떠나거나, 등산을 할 때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가이드''셀파'가 있지만 지도상에 잘 나타난 길의 안내자는 이정표이다. 허나 문명사회에서의 안내자는 지도화 된 '내비게이션'이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도로나 좀더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이나 지형을 송신하여 주니 어디든 못 갈 곳이 없다.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도 이렇게 잘 일러줄 '내비게이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삶의 안내자는 없다. 그러나 있다. 밀착된 삶을 살며, 눈 뜨고 새날 또 만나는 그런 분들로 나는 행복했었다. 표현이 우스운지 몰라도 신()같은 그 존재의 촌로들이 예술과 인생 어느 쪽에서든지 나에게는 '내비게이션'다운 분들 이었다.

 

입을 통하여 나오는 목소리의 길이 있었고 눈길, 당신네들의 그 눈길을 따라 걷는 그 길은 두 말 할 나위없이 더 좋았다. 마음과 마음은 눈으로 통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눈으로 가고 발로 보는 도시의 시가지는 세월이 가도 바뀌지 않는 속마음은 꼭 부모와 자식 사이의 정() 그리고 사라져 버려도 아련한 그리움으로 짙게 남아있었다.

 

인천의 심장통, 미두취인소(후로 한국은행, 현 국민은행 터)와 식산은행(후로 산업은행 터, 현재 주차장)을 끼고 앉았던 '미야마찌', 6·25 전쟁과 분단 그리고 전후의 궁핍한 생활이 만든 성장 소설의 주 무대인 곳, 바람부는 쪽으로 바람과 함께 넘어지며 피흘리는 '에레나'들이 하루를 살기 위하여 없는 웃음을 만들어 몸 밖으로 표출해야만 했던 우리들의 '순이'가 있었던 영욕의 땅.

 

양공주, 양딸라, 양색시, 양갈보 유엔마담 등으로 불리며 다국적 군에게 웃음을 섞어 술을 팔고 몸을 던졌었던 순이 누나들, 갈색으로 물들인 머리와 높은 구두 하이힐이 어색한 걸음걸이에 짙은 화장을 한 에레나가 되어 멸시와 천대를 받고 노부모를 공양하며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 출세할 것을 기다리며 온 몸으로 울었던 우리의 순이들이 흘린 눈물자욱이 남아있는 해안동은 흘러가는 개인의 가()가 아니라 집단적 기억이자 우리의 아픈 표상이다.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세계속의 지워버리고 싶은 상흔, 시간이 흘러 그 상흔은 고통으로 인정되는 것인가.

 

50년대 중반의 '위스키메리' 다국적 군의 유흥업소로 '에레나'들의 근무처.

'승국문화재단', 이승국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세운 재단의 일가를 이루었던 그 성()장터가 그곳으로 모래, 자갈, 양회로 부를 불렀고 한길 건너 '축항사무소' 해원들의 발길이 분주하게 놓던 곳이며 아직도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위스키메리'의 에레나 대모(大母) 성자 아줌마는 세상에 살아 있을까 궁금하고나.

 

이 시대가 낳은 희생양으로 자괴감에 빠져 가족들과 유대를 영영 끊고 폐쇄적인 삶을 살며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지 않았나 싶다. 빌어도 될 일 아니겠지만 세속 인연의 끈을 놓았다면 봉분 위에 따사한 햇빛 온종일 내리길 바랄뿐.

 

통행금지 싸이렌이 울리는 시간, 분주히 서두르는 행렬들 사이사이 에레나 곁에 팔짱을 낀 코쟁이들이 있다면 성공(?)한 하루이건만 쓸쓸히 길위에 족적을 놓아야하는 또 다른 순이는 응봉산쪽으로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어둠속으로 사라져 가고.

 

다음 날 아침 우리의 옛 기억속에 익숙한 '넉스'비누, 그리고 '쪼꼬렛' '츄잉껌' 아니면 '립스틱'등으로 대가(?)를 받은 그들의 발길은 신포시장, 중앙시장, 양키시장으로 향하였다. 돈을 받았다면 현재 유통되는 달러가 아닌 군표를 환전하기 위한 발길, 그 시절 시쳇말로는 회화벌이는 그들이 했다는 말도 있었다.

 

치옥의 언니 매기는 흑인 병사의 아이까지 낳고 미국으로 갈 희망에 목숨을 걸고 기다렸지만 미군 지프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 누워 있었다. 술 취한 흑인 병사에 의해 죽임을 당한 매기언니의 슬픔이 녹아있는 오정회의 <중국인거리>이 소설속의 주인공은 수없이 많았다. 정말 가는 사람도 있긴 있었나보다. 중앙동 통 '범흥공

'(현재도 있음)에서는 이주에 필요한 서류작성이 간간이 있었다함이 다행이었다.

 

선우휘 원작의 <깃발 없는 기수>속의 하룻밤 이야기는 추억의 엽서랄까. 잊을 수 없고, 이범선의 <오발탄> 오영수의 <안나의 유서> 등의 문학작품들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 가수 안다성의 노래 <에레나가 된 순이>의 모습을 잊었냐고.

 

나의 초등학교 시절 일본인들 보다도 더 미운 그들, 나는 왜 그들에게 껌을 달라고 외쳤을까. 얼굴을 들 수 없고나.

 

시인 김학균

 

 

'인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에서 묻다 흔적들 11  (2) 2023.05.14
부평 군전용 철도길  (0) 2023.05.14
이제 각국의 터 쟁탈서 헤어나 자유공원인가  (2) 2023.05.13
다시 보는 인천상륙작전  (0) 2023.05.13
음악다방의 향수  (1) 2023.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