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묻다 흔적들 11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9-21 23:11:53
분주함은 사라지고 적막감만
길에서 묻다 흔적들 11
도시로 몰려든 문명의 이기를 생각하면 도시는 채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수도승처럼 비우고 또 비워야하는 것이 도시다. 익명성을 포기해야 할 일도 있지만 진정으로 끄는 도시의 매력은 도심 한 가운데에서도 숨 쉴 수 있는 자연이다. 눈돌려보면 다 자연이라 하겠지만 자신의 원형을 발견 할 수 있는 곳이 진짜 자연으로 오아시스 같은 그런 곳, 비록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전생의 인연처럼 뿌리내리고 이날 이때까지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고향 같은 맛을 줄 수 있는 곳은 도시의 속살을 사생한 고향이나 다름없다.
더 요구 한다면 저항의 역사가 도시의 길, 골목골목마다 어려있는 곳이라면 더욱 좋겠다마는….
탈것을 이용하지 않고 동서남북 걸어 다닐 수 있는 개항장 일대는 첫 번째 도시이자 근대의 장으로 선사(先史) 이후 2천살 나이를 가진 인천의 핵심도시다. 이러한 유서가 깊은 공간에서 수많은 사건과 인물의 부침(浮沈)도 있으면서.
재생도시의 면모를 보면 겉핥기에 충실한 나머지 속은 텅비어 공도의 현상이 뚜렷이 남아있다. 도시재생의 원류는 도시공동화를 막으려는 영국의 전후에 실행된 일이지만, 인천은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일이기도 하였다. 열강의 각축전과 동란의 폐허에서 세우는 도시재생사업은 한때나마 흥을 돋우며 번창하여 왔으나 날이 갈수록 도심권에서 일고 있는 공동화현상(인구감축)은 어떻게 막아야 할지 남의 일 같지 않은 일이다.
사도(思道)에서 사도(邪道)를 걷지 않으며 느릿느릿 흐르는 서정적 도취를 음미하며 이드거니 읽고 또 보며 걷는 길은 유년의 기억과 결속한 삶의 궤적이 담겨있는가 하면 도시와 자신의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역사가 숨쉬고 영욕이 혼용된 역사의 나이테가 분장한 채 출연하고 있다.
제물량 길로 선을 그은 항동과 해안동은 해 떨어지면 적막이 따로 없다. 간간히 지나는 사람들 마저도 쓸쓸하다. 희미한 가로등, 흡사 핏기없이 늘어진 생선과 같은, 소생 할 날 없이 절망스러운 슬픔의 길로 걸어들어오는 에레나의 집, 해안동 3가의 모퉁이(서도회관 건너편)는 또 한번 분주하다. 이들의 집합숙소는 ㄷ자형으로 넓은 앞마당 뒤로 칸칸이 방으로 꾸며 하루의 수입을 예약한 즐거운 비명이 있는 반면 공친 하루의 허를 달래는 술판이 밤늦게 까지 벌어졌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판을 깨는 것은 여명의 꼬리를 느리며 서서히 밤을 밀어내는 새벽, 통금을 해제시키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잠자리에 들며 끝이 났었다.
월미도에 주둔한 미군의 트럭과 다국적군이 주둔한 항만의 물자수송을 위한 교통량으로 한낮은 그렇게 분주했었다. 지금은 경제판도에 한 획을 그으며 재벌의 대열에 들어선 모기업 '한진'은 그때 그 시절 태동의 성(成)을 쌓았던 기업으로 새 주소 해안길 2가 14번지 '인일공장소'의 일부 터,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미군과 다국적군의 군용물자 수송을 담당했던 수송업이 오늘날의 한진을 이루었던 것이다. 세상사에 떠다니는 말로는 창업주 고 조중훈 회장의 누이동생이 직접나선 비즈니스의 효과로 이루어졌다는 속설. 이제나마 창업주의 성공지 그곳에 기릴만한 표상하나 남겼(건립)으면 싶은 바람을 가지고 있는 인천인들을 생각하면 얼마나 좋을까. "인천은 있으되 인천경제는 없다"는 말을 부지불식 시킬 절호의 기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을 깨우쳤으면 싶다.
"앵~앵~앵"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잠자던 사람들 속옷 차림으로 문밖을 나서면 미군 소방서 사람들(미군속 한인및 미군)은 분주히 소방차에 올라 출동을 하던, 현 해군 서도회관자리의 미군소방서는 밤에도 대낮같이 불을 켜고 또 다른 세상을 만들며 악동들을 불러 모았었다. 장비 및 소방차의 값비싼 예산으로 엄두도 못 낼 우리의 소방서는 태동기,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신세(?)를 피할 길 없었으니 가난이 원망스러운 시절은 그렇다해도 에레나가 된 순이 누나를 괴롭히는 코쟁이 그들이 미워 우리의 악동들은 밤마다 '써치라이트' 불빛이 대낮같은 그 소방서 주변에서 놀았었다. '찜푸'아니면 '가이생'놀이를 하며 통금전까지. 지금은 그 길이 4차선으로 늘어났지만 초등학교 4학년 내 또래들은 잘 숙련된 돌팔매질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었다.
길 건너 컴컴한 골목, '써치라이트'를 정조준 하거나 아님, 그들의 사무실을 표적으로 던진 계란만한 차돌은 여지없이 목적을 달성하고 울리는 '쨍강'소리에 맞추어 악동들은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니 집을 찾아 들어가 버리는 나 몰라라 게임.
다음날 눈뜨고 다시 모이는 악동들은 그들(미군들)에게 웃고 있었다. "웃는 얼굴엔 침 못 뱉는다"는 옛말을 상기하며.
/김학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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