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곶 들노래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9-01-20 00:23:34
서곶 들노래
영농수단이 기계화되었다고 해도 노동력이 따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전혀 인력에 의존하던 예전의 벼농사는 더욱 고달팠다. 모내기로 시작해 가을에 거두어들이기까지 그것은 피와 땀의 연속이었다. 지금은 경운기·이앙기·바인더 등이 있어 인력을 대신하나 예전엔 모두가 수작업이었다.
모내기 전날 가족이 모두 못자리에 나와 쭈그리고 앉아 어린모를 뽑아 뿌리의 흙을 털어 다발로 묶었다. 이것이 모찌기였다. 그것들을 옮겨다 모내기를 하고 뿌리내려 자라기 시작할 무렵이면 김매기를 했다. 잡초를 뽑고 북돋는 작업이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세차례를 해야 했다. 그럴 즈음이면 이삭이 패기 시작했다. 낟알이 여물어 가면 피사리를 하고 아이들은 ‘훠이훠이’ 새쫓기를 했다. 다음 차례가 벼베기였는데 하나같이 쉬운 일이 없었다. 여름내 등굽혀 일하느라 등골이 빠진다고 했다. 노인은 잠자리에서 돌아누울 때마다 앓는 소리를 냈다. 그것을 엄살하신다고 했다.
농사하며 힘들 때 농부들은 스스로 노래를 부르면서 잊으려 했다. 이것이 들노래였다. 모찌는 소리가 있고 모심는 소리가 있으며, 김매는 소리가 있었다. 선창자의 ‘받는 소리’에 따라 부르는 소리를 ‘매기는 소리’라고 했다. 모찌는 소리는 “쪘네 쪘네 여기도 한뭉치 쪘네” “너도 찌고 나도 뽑아 다들 잘도 찌는구나”요, 모심는 소리는 “심었네 꽂았네 여기도 한폭 심었네” “너도 심고 나도 꽂아 다들 잘도 심는구나”이며, 김매는 소리는 “에이여 에이여 에헤요 어얼사 좋구나” “김을 매세 김을 매세 모두다 같이 김을 매세”였다.
서곶 들노래는 서구지역의 농민이 농사를 하면서 부르던 농요였다. 지금은 도시화로 아파트 단지가 되었으니 경지도 사라졌거니와 들노래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것을 서구향토문화보존회에서 그동안 노력해온 끝에 되살려 놓을 수 있었다. 지난 2006년 전북 정읍에서 있은 제47회 전국민속예술축제에서는 인천시대표로 출전해 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지난 연말에는 인천시무형문화재 18호로 지정되었다. 향토의 농요가 전승되고 있는 것은 매우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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