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년의 영종도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9-02-10 16:49:37
1867년의 영종도
-영종진 설치와 호적대장-
▲ 임학성(인하대 한국학연구소 교수)
# 자연도에서 영종도로
영종도(永宗島)의 옛 이름은 자연도(紫燕島)인데, 자줏빛[紫]의 제비[燕]가 많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런 운치 있는 이름이 ‘영종’으로 바뀌게 된 연유는 조선 효종 4년(1653)에 남양(현재의 화성시 일대)에 있던 영종수군진(水軍鎭)을 자연도로 옮기면서 ‘영종진’이란 명칭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 곧바로 ‘자연’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이후로도 상당 기간 섬 이름은 ‘자연’이었고, 수군진의 명칭만 ‘영종’이었을 뿐이다. 그러다 슬그머니 섬 이름이 ‘영종도’로 바뀌게 된 것이다. 명칭 변경 시기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겠다. 다만, 1875년 일본군함 ‘운양호’에 의해 영종진이 함락된 이후, 현재의 구읍 나루터 쪽에 치우쳐 있던 영종진이 백운산 아래의 섬 ‘중심부’로 옮겨지게 되는 사건이 주요 계기였지 않나 추측해 본다.
# 크게 증가한 영종 주민수
영종진 설치로 자연도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되는데, 가장 큰 변화는 섬 주민의 증가였다. 진을 설치한 직후인 1656년(효종 7)에 백성들을 모집해 들어와서 살게 했으며, 1678년(숙종 4)에는 섬에 있던 국영 말목장을 없애고 사람들을 불러들여 목장 터를 농토로 경작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입주 정책의 결과, 예전에 그렇게 많던 사슴이 늘어난 주민 때문에 거의 멸종됐다고까지 중앙에 보고될 정도였다.
영종진 설치 후, 그 관할 하에 있던 자연도(영종도)와 삼목도, 용유도 등의 주민수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이들 세 개 섬을 합쳐 ‘영종’이라 부르겠다]. 우선 진 설치 후 약 100년이 지난 1759년(「여지도서」)에는 주민수가 850호 3천38명에 이르렀으며, 이로부터 30년 후인 1789년(「호구총수」)에는 1천28호 3천155명으로 주민수가 급증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시기 인천 전체의 주민수가 4천96호 1만4천566명이었으므로, 당시 영종의 주민수는 인천 전체의 약 4분의 1 규모에 해당했던 것이다.
▲ 동여도속의 영종
# 인천 유일의 영종진 호적대장
현재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에는 영종 관련 고문헌이 한 권 소장돼 있다. 정식 명칭은 ‘同治六年正月 日永宗防營今丁卯式帳籍冊’이며, 크기는 57㎝(세로)·40㎝(가로), 분량은 1책 93쪽이다. 이 자료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동치 6년 즉, 1867년(고종 4·정묘) 영종방어영(永宗防禦營)에서 호구조사를 시행한 후 작성한 호적대장이다. 자료에는 당시 영종진의 관할 하에 있던 영하면(營下面)·전소면(前所面)·후소면(後所面;이상, 영종도)과 삼목면(三木面;삼목도), 용유면(龍流面;용유도) 등 5개 지역 주민들(908호 2천781명)의 이름과 직역·연령을 비롯해 호주와 그 처의 4조(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 등이 기재돼 있다.
따라서 영종 섬의 역사는 물론, 더 나아가 인천지역사를 연구·복원하는 데에 이보다 더한 자료는 없다 하겠다. 특히, 조선시대에 작성된 인천지역의 호적대장으로는 유일하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지금까지 인천지역의 호적 자료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개항기(1898년)의 ‘신식호적’ 2책(답동과 축현외동)과 여러 기관 및 개별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류(호구단자, 준호구 등)만이 알려졌을 뿐이다.
또한, 섬 지역의 호적대장으로는 매우 희귀한 자료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섬 지역의 호적 자료는 제주도의 18~19세기 ‘호적중초’들과 전라도 청산도의 1876년 호적대장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처럼 소중한 자료가 국내에 남아 있지 않고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간 것일까? 아쉽게도 현재로서는 그 연유와 경로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이런 답답함과 안타까움은 이 경우 하나만이 아님을 우리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해외에 나가 있는 자기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귀환’시키지 못하는 나라가 애써 ‘문화강국’, ‘문화선진국’임을 떠든 듯 그 누가 거들떠 보겠는가! 더군다나 불법적인 약탈물(예를 들어,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가져간 강화도 외규장각문서) 조차도….
내가 ‘약탈물’이란 표현을 쓴 까닭은 바로 영종진 호적대장이 그러할 가능성이 있다는 가정 하에서다. 1875년 ‘운양호사건’으로 일본군이 영종진을 점령했을 때 대포·소총 등의 무기와 함께 병서(兵書)·영종성도면(永宗城圖面) 등의 문헌을 전리품으로 탈취해 간 사실이 있다. 이 문헌들 속에 바로 1867년 영종진 호적대장도 포함됐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가능성을 ‘공론화’시켜 인천으로의 ‘귀환’ 작업을 추진해보는 일도 괜찮겠다.
▲ 18세기 중엽의 영종도(‘여지도서’에서)
▲ 19세기 말엽의 영종도(‘기전읍지’에서)
※사진 자료(<지도 1>, <지도 2>) 설명문 : 18세기 중엽(지도 1)과 19세기 말엽(지도 2)의 영종도 지도를 비교해 보면, 영종진이 섬 아래쪽에 있다가 중심부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 1867년 영종진 호적대장의 본문
※사진 자료(<사진>) 설명문 : 1867년 당시 영종진 관할 하에 있던 5개 면 주민들의 인적 사항을 각 호(戶)별로 기록하고 있다.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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