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진의 설치, 해랑적(海浪賊)을 잡아라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9-02-28 00:53:07
백령진의 설치, 해랑적(海浪賊)을 잡아라
▲ 유창호(옹진군지 편찬위원회 전문위원)
서해 최북단에 위치한 백령도는 흰 따오기가 날개를 펼치고 공중을 나는 모습이라 해 이름 지어졌다고 하나 이 섬의 역사는 그 이름만큼 낭만적이지는 못하다. 백령도는 고려 말 이래로 수없이 왜구(倭寇)와 해적(海賊)들의 침입을 받았고, 서해의 절도(絶島)라는 이유로 주요 범죄자들의 유배지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백령도는 일찍이 고려 태조 때 진(鎭)이 설치되고, 현종 9년(1018)에는 진장(鎭將)을 두었다. 그 규모 또한 정종 9년(1043)과 문종 5년(1051)에 발생한 대화재로 성문 200여 칸, 창고 50칸, 민로(民盧) 300칸이 소실됐다는 『고려사』의 기록으로 볼 때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한편 고종 7년(1220)에는 백령진장 이세화(李世華)에 의해 향교가 설립되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 말에 창궐한 왜구의 침입으로 백령도는 버려진 섬이 되고 만다. 공민왕 6년(1357) 문화현 동촌으로 진(鎭)과 주민들 모두가 옮겨지고, 공양왕 때에는 아예 진을 없애 문화현의 직촌(直村)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는 해전에 능한 왜구를 섬에서 상대하느니 차라리 내륙으로 끌어들여 육전을 벌여 격퇴하자는 소극적 방어론인 ‘공도정책(空島政策)’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 백령도 사곶해변(옹진군 홍보자료관 http://photo.ongjin.go.kr/)
조선 초기에도 공도정책은 계속 유지됐으나 소금과 수산물, 그리고 울창한 산림과 농경지가 있는 섬들을 그냥 비워두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내륙의 주민들은 공도정책 하에서도 끊임없이 섬으로 유입했고, 중앙정부에서도 섬은 국가의 재부(財富)를 창출하는 곳으로 인식이 변화했다. 결국 세종 10년(1428) 강령현 소속으로 백령진을 다시 설치하고, 세종 13년(1431)에는 국영목장(國營牧場)을 설립했다. 세종대 백령진의 설치는 공도정책을 포기하고 적극적으로 외적을 방어하려는 ‘해도입보론(海島入保論)’의 표출이었고, 교통과 국방 그리고 외교에도 큰 몫을 차지하는 말(馬)목장의 설치, 선박 및 각종 건축에 필요한 재목(材木) 확보를 위한 송전(松田)의 설치와 같은 ‘해도개발론(海島開發論)’의 시책이었다. 그러나 세종대 이후 백령진은 유명무실해졌고, 어느 시기인가 폐진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서해 도서들은 또다시 왜구와 해적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백령도를 비롯한 서해도서에서 출몰한 왜구와 해적은 조선정부의 크나큰 골칫거리였다. 연산군과 중종대의 집중 토벌에도 불구하고 명종·선조대에 이르기까지 왜구와 황당인(荒唐人) 등의 해적들은 끊임없이 서해안에 나타났고, 이들은 백령도와 대청도에 집을 짓고 배를 수리하기 위한 대장간을 만드는 등 섬을 그들의 근거지로 사용하기까지 했다(『명종실록』 권 5, 명종 2년 2월 12일). 특히 ‘해랑적(海浪賊)’이라 불린 해적들이 주목되는데 이들은 왜구와 황당인과 같은 외국인이 아니라 조선의 도망민까지 포함된 해적이었다. 해적을 대신하는 일반명사로 사용될 만큼 유명해진 해랑적은 요동반도 앞 발해만에 위치한 해랑도(海浪島)의 도적이란 뜻이다.
해랑도는 해양도(海洋島)로도 불리는데 일찍이 해금(海禁)정책을 취한 명나라에서도 관심을 두지 않은 섬이었다. 그리고 황해도 장연에서 표류한 자가 8일 만에 해랑도에 도착했다는 말(『성종실록』 권268, 성종 23년 8월 4일)로 보아 해류를 이용하면 백령도에서도 손쉽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제주도민들까지 해랑도로 들어가 요동사람들과 함께 물소를 키우고 농사를 지으면서 조선과 밀무역을 벌이기도 했다. 조선정부는 이들을 수토(搜討)하고 쇄환(刷還)해야 했으나 조선의 국경 밖이라는 이유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성종대에 해랑적 수토를 위해 요동도사에게 자문(咨文)을 보냈으나 응답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이 즉위한 후 적극적인 해랑적 수토책이 나왔다. 요동도사가 아닌 명 황제에게 직접 사신을 보내 주문(奏問)한 것이다. 이때에는 처음 5호에 불과했던 해랑도 주민이 1천여 호에 이르고 군사조직까지 갖추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연산군일기』 권31, 연산군 4년 12월 11일). 따라서 연산군 6년(1500) 초무사(招撫使) 전림(田霖)과 부사 이 점(李 土+占)이 군사를 거느리고 해랑도에 들어가 주민들을 쇄환했다. 연산군 6년(1500) 6월 28일 보고에 따르면 당시 해랑도는 비워져 있었고 서쪽 2일 노정(路程)의 장산도(長山島)에 숨어 있는 중국인 78명과 조선인 34명을 잡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연산군대의 해랑도민 쇄환에도 불구하고 해랑적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등장한다. 이미 해랑도의 존재가 알려졌고, 육지에서 범죄를 저지른 자와 갖은 수탈로 유리(遊離)하게 된 도망민들에게 해랑도는 최후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중종대에도 해랑도에는 여전히 중국인 수천 명과 조선인 400~500명이 존재한다는 보고가 있었다(『중종실록』 권62, 중종 23년 8월 6일). 해랑적은 특히 해로가 이어지는 황해도 연안에 출몰했다. 특별한 무기는 소지하지 않았으나 큰 돌들을 수십 개씩 싣고 다니며 조운선(漕運船)과 어선(漁船)들을 파손시키고 물건을 약탈했다. 조선정부는 이들 해랑적을 막는 근본방지책이 또다시 대두됐다. 명 정부는 계속 해랑적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고, 따라서 이번에는 수군진(水軍鎭)을 설치하는 관방체제(關防體制)의 개편으로 추진됐다.
광해군 1년(1609) 1월 18일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 이항복(李恒福)은 비변사 낭청을 통해 백령도에 진(鎭)을 설치할 것을 건의한다. 그리고 그 목적이 해적들의 수토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대체로 백령도는 서쪽 대양(大洋)에 똑바로 대하고 있으므로, 우리나라에 작폐(作弊)하러 들어오는 해적들이 반드시 이 섬에 몰래 정박해 여기에서 땔나무를 하고 여기에서 물을 길어 마시고 여기에서 순풍(順風)을 기다린 다음에 비로소 내양(內洋)으로 들어와 해서(海西)에서 도적질을 하고, 혹은 정서풍(正西風)을 얻어 남쪽으로 내려가서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 등지로 들어가기도 하니, 이 섬은 바로 해적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문지방과 난간이 돼 있습니다.”(『백사집』 별집 2권 계사 백령설진사의계
이항복의 건의는 곧바로 광해군의 윤허를 받고, 같은 달 24일 백령도에 새로 진을 설치하고 개간을 허락하는 전교를 내린다. 백령진은 이전과 달리 황해도 은율의 광암보(廣巖堡)와 장연의 아랑보(阿郞堡)를 관할하는 거진(巨鎭)으로 세워졌다. 첨사[종3품의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도 반드시 관직과 녹봉이 높은 무인으로 선발했는데, 처음 이항복은 당상관에서 선발하려 했으나 적당한 인물을 찾지 못하고 정3품 당하관인 훈련도감 천총 김립신(金立信)을 추천했다. 이는 김립신이 일찍이 풍천(豊川)의 수령이었기에 이 섬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 참작된 것이다. 이후 광해군 6년(1614)에는 백령진에 정3품의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파견해 격을 높힐 것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광해군일기』 권78, 광해군 6년 5월 22일, 30일).
초대 첨사 김립신은 군기(軍器)를 정비하고 상업을 일으켜 군량미를 3천900석(石)이나 마련하며 진(鎭)의 근기(根基)를 만들었다(『설학선생문집』 권2, 백령도지). 그러나 10년도 못 돼 광해군 10년(1618)에는 “세월이 오래되자 인심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됐고 모집해 들여보낸 사람들을 나날이 더욱 심하게 침탈하고 있습니다. 그리해서 들어가 방어하는 군졸들이 점점 피폐하게 됐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자취도 없이 흩어져 수습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광해군일기』 권133, 광해군 10년 10월 18일)라는 비변사의 보고가 있을 정도로 문란해지고 말았다.
400년이 흐른 현재 백령진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진촌(鎭村)이라는 지명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백령도는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두고 북한과 대치하는 국방의 요지이고, 여전히 밀려오는 중국 어선들의 불법 어로행위를 막아 우리 어민을 보호해야 하는 현실은 400년 전과 마찬가지인 듯 싶다.
<※ 자료제공=인천역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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