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과 인천지역사회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9-03-05 19:57:21
광복과 인천지역사회
양윤모(인하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에서 벗어났다. 그 형태가 ‘도둑’처럼 왔던, 예정된 것이던 간에 그리고 해방(解放)이던, 광복(光復)이던 간에, 일제의 긴 식민통치가 끝난 것은 분명했다. 그렇지만 한반도의 모든 것이 1905년 혹은 그 이전 우리의 주권이 행사되던 그 상태로 복원된 것이 아닌 것도 분명했다.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했다지만, 인천을 비롯한 한반도 주요 지역은 여전히 일본군 내지 일본경찰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바로 혼돈의 시기였다. 라디오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들은 인천시민들은 그날 오후 애관극장 부근에 모여 광복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리고 조봉암을 중심으로 인천치안유지회가 조직돼 치안공백에 대비했고, 이외에도 치안괸리위원회와 인천선무학생대, 인천학생대 등이 조직돼 인천사회의 안정을 도모했다. 반면 인천의 일본인들은 인천세화회를 조직해 자구책 마련과 귀국 준비를 서둘렀다. 이처럼 해방은 조선인에게나 일본인에게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상황은 9월 7일 미 육군 선도대가 인천에 도착하면서 일단 정리됐다. 맥아더는 9월 2일 일본 동경에 연합군사령부를 설치하면서, 38도 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한반도를 분할·점령한다고 발표했다. 미군의 진주는 이 발표에 의거, 이루어진 것이다. 다음 날 맥아더는 남한에 미군정(美軍政)을 선포했고, 미 제7사단 병력이 본격적으로 인천을 통해 상륙, 진주했다.
인천시민들이 미군 상륙을 환영하기 위해 모였다. 연합국기를 들고, <해방군>을 맞이하기 위해 축하 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무장한 일본군인들이 외곽에서 경비를 섰고, 미군이 상륙할 예정인 부두와 각 주요 네거리는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경찰이 있었다. 상륙하려는 미군과 미군을 환영하려는 인천시민 그리고 인천시민을 통제하려는 일본경찰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어느 순간, 환영 나온 인천시민들은 갑작스런 일본경찰의 발포로 두 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 당했다. 9월 10일 오전 10시, 사망한 인천시민의 <시민장(市民葬)>이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 주최로 거행됐다. 많은 인천시민과 미군 장교 30여 명이 이들을 애도했지만, 인천시민들에게 해방군과의 만남은 참으로 고단한 일이었다.
▲ 조봉암과 진보당창당대회
미국과 소련의 대 한반도 정책에 따라 남쪽과 북쪽에서 각각 미군정과 소군정이 실시됐다. 남쪽의 미군정 책임자는 하지 중장이었고, 인천의 미 군정관은 스틸맨 소령이었다. 군정관 스틸맨은 미군정의 확고한 정책에 따라 인천의 행정권과 치안권을 신속하게 장악하고 행사했다. 스틸맨이 운용하는 인천의 미군정은 1945년 11월 중순쯤, 인천 경찰서의 각 부서와 책임자들에 대한 선임을 거의 완료하게 됐다. 처음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산하 보안대 출신과 한민당 성향의 인사들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듯 했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 인사들과 일제 경찰 출신들이 주로 포진하게 됐다.
이처럼 미군정과 인천 경찰서가 완비되면서 본격적인 식민 청산이 이루어지게 됐지만, 그 과정에서 좌우익의 갈등이 부각됐고 인천지역의 정치세력도 좌우익으로 확연하게 분리됐다. 이를테면 1945년 11월에 있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환영위원회 개최와 12월 신탁통치 문제는 이들의 갈등을 심각한 수준으로 노출시켰다.
먼저 한민당 인천지부는 11월 임시정부 환영대회를 성대하게 개최하기 위해, 17개라는 방대한 부서와 36명의 위원을 결성하고, 5만원에 달하는 비용을 각 정회(町會)와 지역 유지들에게 분담키로 결정했다. 이에 조선공산당 인천지부 및 좌익은 한민당 인천지부 인사들의 친일 경력 등을 집중적으로 문제 삼으며, 임시정부 환영 대회를 피폐한 인천 시민들의 생활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허장성세를 과시하려는 선전장으로 이용한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한민당 인천지부는 임시정부를 정통정부로 봉찬(奉讚)하는 것은 민족적 전통을 분명히 하는 대의명분이며, 자주독립 완성의 대국적 견지에서 친일파의 숙청 문제는 오히려 지엽의 문제라고 반박했다.
의도되었던 아니던 간에, 소련에 의해 제기되었다는 1945년 말, 동아일보의 한반도 신탁통치안 보도는 인천의 정치세력을 보다 분명하게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는 계기가 되었다. 모스크바 삼국(미국·영국·소련)회의에서 결정된 한반도 신탁통치의 소식이 전해진 초기에는, 좌?우익의 단체와 정당을 막론하고 모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각각의 성향에 따라 운동에 대한 찬?반과 함께 정치적 이해 관계에 의한 입장의 차이가 드러났다.
좌익의 경우 처음 탁치(託治)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의 자주와 독립은 우리 인민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목표’ 라면서 ,조선의 자주 독립이 침해를 받는다면 ‘우리는 과거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던 이상으로’ 단호하게 투쟁할 것을 선언했다. 그렇지만 1946년 1월 2일과 4일에는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의 명의로 ‘결정서’와 ‘모스크바 3상 회담 결정지지 결의서’를 공식적으로 발표해, ‘모스크바협정’에 대한 찬성의 입장으로 돌아섰다. 많은 연구자들은 좌익의 이러한 태도 변화가 소련 측의 지령에 의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 일제강점기 막바지 인천항 모습
한편 좌익 측의 이러한 입장의 변화와는 달리, 우익과 이념적으로 편향성이 없는 각 사회단체들은 ‘신탁통치’를 행한다는 ‘모스크바 협정’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성명과 결의문 등을 통해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12월 29일, 인천에서는 인천시의 각 동회장들과 인천시 직원들이 신탁통치 반대 결의를 하고, ‘삼국 외상회의에서 결의된 우리 조선의 신탄통치를 절대 반대하는 동시에 공약한 자주독립을 즉시 실시하기를 요망’ 한다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어 인천의 재계 인사들과 각 정당, 사회단체들은 12월 31일에 내리교회에 모여 ‘인천시민 결의대회’를 개최하고 결의문을 작성했다고 한다. 또한 서울 극장협회는 12월 28일 긴급 이사회를 개최하고, 신탁통치 거부투쟁을 위해 시내 16개 극장 문을 닫았으며, 전국의 흥행업자들도 이에 동조해, 인천의 극장들도 이 날 하루 문을 닫고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결의를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좌·우익의 입장 차이는 결국 물리적 충돌로 까지 이어졌다. 1946년 5월 16일 한민당 인천지부와 독립촉성중앙위원회 주최로 열린 ‘대한독립전취국민대회’에 참여한 반탁학생연맹 소속 학생들과 인천지구노동조합평의회 소속 노동자들이 노조회관 앞에서 충돌했다. 이때 미군정은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조사조차 하지 않고 노동자들만을 체포·조사하는 등, 철저하게 우익 편을 들었다. 더욱이 좌우익의 대립이 더욱 치열해지는 6월 말에는 좌익의 중요한 대중적 기반인 인천지구노동조합평의회 위원장을 5월 사건에 연루자로 체포했다.
▲ 광복과 시민들
미군정의 호의적인 상황 정리에 힘입은 우익은 5월 19일에 인천 공설운동장에서는 독립촉성국민회 인천지부 주최로 ‘독립전취국민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는 사실상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대회였으며, 신탁통치를 수용하고자 했던 좌익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는 대회였다. 특히 이 자리에 참석한 이승만은 ‘이제 우리는 우리 나라를 찾기 위해서 싸워야 하겠소. 여러분도 나와 같이 싸움꾼이 됩시다. (…중략…) 공산당은 우리 나라를 팔아먹으려 하오. 우리는 이들과 싸우지 않으면 아니 되오. (…중략…) 공산당들은 저들이 조국이라고 부르는 소련으로 가서 살라고 쫓아 버립시다’라고 해 노골적으로 좌익을 공격하는 선동적인 연설을 했다.
이처럼 미군정이 적극적으로 우익을 지원하는 형국에서, 이승만과 같은 거물 정치인의 지원으로 인천지역은 점차 우익 세력이 주도권을 잡아갔다. 게다가 신탁통치 문제에 대한 반탁에서 찬탁으로의 좌익의 입장 변화와 인천 좌익을 대표하던 조봉암의 계급독재에 대한 비난 성명서는 찬탁을 주장했던 인천 좌익의 입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리해 인천의 정치 세력은 중도 세력이 없이 점차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좌익은 이에 저항하는 추세가 1948년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까지 계속 되었다.
※ 자료제공: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글쓴이 : 양윤모(인하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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