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찬장 ‘연평도’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9-03-18 14:33:38
조선의 찬장 ‘연평도’
▲ 유창호 (옹진군지 편찬위원회 전문위원)
# 조기는 [ ] (이)다.
해마다 청명·한식이 되면 제주도 남방 동중국해에서 월동하던 조기들이 산란을 위해 서해바다로 대이동을 한다. 지금은 더 이상 서해연안에서 보기 힘들어졌으나,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조기들은 쿠로시오 난류를 타고 칠산 앞바다로, 죽도로, 연평도로 그리고 평안북도 대화도까지 올라가 산란을 했다. 산란을 위해 회유(回遊)하는 조기들은 흡사 개구리 울음소리를 내며, 물 위로 튀어 오르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배 위의 어부들이 바다 속에 대나무 통을 넣고 조기 소리를 기다리며 그물을 쳤던 그 시절, 무게를 못 이겨 그물이 터질 정도로 조기를 가득 싣고 돌아오던 그 시절을 상상해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 오른다. 지금은 프리미엄급 굴비 한 마리가 20만 원을 넘기도 하는 초고가 상품이지만, 어렵고도 가난한 시절 그나마 밥상에 올라온 조기가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 주었던 그런 시절도 있었다. 그러면 조기는 우리에게 어떠한 존재일까? 원고청탁을 받은 후 나는 괄호 속에 어떠한 말을 집어넣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계속했다.
조기가 어느 때부터 우리 식탁에 올라왔는지는 상고해 보기 힘드나 적어도 고려시대부터는 조기요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의 문신 이색(李穡, 1328~1396)의 맛깔스러운 시(詩) 한 편을 인용해 보면,
잔 비늘은 석수어라 이름하는데 (細鱗名石首)
아름다운 술은 춘심을 채워주네 (美酒實春心)
거품 뜬 술은 향기를 막 풍기고 (浮蟻香初動)
말린 고기는 맛이 절로 깊구나 (乾魚味自深)
‘자복(子復)이 법주(法酒)와 말린 석수어(石首魚)를 대접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중에서
(목은집(牧隱集) 목은시고(牧隱詩藁) 제22권)
▲ 연평도 안목선착장
이 시를 볼 때 조기[石首魚]를 말린 ‘굴비’가 당시 이미 요리로서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굴비(屈非)의 유래가 고려 중기 영광으로 귀양 간 이자겸(李資謙, ?~1126)이 임금에게 바쳤다는 데서 연원한다는 전설로 볼 때 그 시기는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까지 조기는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는 생선이 아니었다. 조기는 종묘(宗廟)에 천신(薦新)하는 제물에, 혹은 중국 사신에게 바치는 진헌물건(進獻物件)에서 빠질 수 없는 품목으로 귀중히 여겨졌다. 『세종실록지리지』 황해도 해주목조에 “석수어(石首魚)는 주의 남쪽 연평평(延平坪)에서 나고, 봄과 여름에 여러 곳의 고깃배가 모두 이곳에 모이어 그물로 잡는데, 관에서 그 세금을 거두어 나라 비용에 쓴다.”고 기록하고 있어 조선 초에 이미 연평도에서 대규모 조기잡이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염장(鹽藏)기술이라든지 운반·유통을 생각해 볼 때 육지의 일반 백성들까지 쉽게 먹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연안(沿岸)과 도서(島嶼)의 개발이 이루어지고, 장시(場市)가 전국적으로 설치된 조선 후기에 가서야 비로소 조기는 대중적인 음식이 됐다. 그래도 워낙 귀한 음식이라 제사 등 특별한 날에만 맛볼 수 있었다. 1908년 통감부 농상공부 수산국에서 간행한 『한국수산지』를 보면 “석수어(石首魚)는 경상남도 마산(馬山) 서북(西北)으로부터 평안도에 이르는 연해(沿海)에서 나고, 본방인[本邦人=조선인]이 가장 즐겨하는 어류의 하나인데, 관혼장제(冠婚葬祭)에 빠져서는 안 되는 물품이다.”라고 적고 있다. 지금도 제사상에 결코 빠질 수 없는 음식인 조기... 괄호 안에 하나를 적는다. “조기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다.”
구한말부터 번성하기 시작한 조기어업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대규모 산업화됐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어선들까지 서해연안에서 조기를 잡았다. 삼국이 경쟁해도 그만큼 조기는 지천이었다. 이제 중하층의 서민들도 맛볼 수 있는 음식이 된 것이다. 6·25전쟁 동안에도 계속됐던 조기어업... 조기는 우리에게 보배와도 같은 존재였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 박수근(朴壽根)의 「굴비」라는 작품을 보면 그 시대의 슬픔이 보인다. 도마 위에 오른 두 마리 굴비와 식칼 하나... 한 사람에 한 마리씩 먹지 못해 굴비를 토막 내어야 했던 당시의 가난함 속에서, 지금은 혹 잊고 있는 가족의 따뜻한 정(情)이 느껴진다. 괄호 안에 하나를 더 적는다. “조기는 [情]이다.”
# 연평 바다로 돈 실러 가세
▲ 조기들의 회유 (연평도 조기탑)
인천으로부터 뱃길로 127km 떨어져 쾌속선으로 2시간 가량 소요되는 위치에 있는 연평도는 일제시대 전라도 칠산어장, 평안도 용암어장과 더불어 조기의 3대 어장으로 불리었다. 이뿐만 아니라 근·현대 신문자료들을 살펴보면, 「석수어의 왕국」·「전조선의 찬장」·「서조선의 대보고」등의 수식어를 부여받으며 조기어업의 중심지로 매년 어획상황이 보도됐다.
연평도는 조기들의 산란을 위한 최적의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즉, 근해의 한강·임진강·예성강이 합류되는 곳으로 강을 통해 밀려온 퇴적물들은 조기들의 먹이인 새우 등의 동물성 플랑크톤을 충분히 공급해 주었다. 따라서 동중국해에서 월동한 조기들은 3월이면 흑산도로 북상하고, 4월 하순이면 연평도에 도착해 30~40일간 이곳에 머물렀다. 연평도에 도착한 조기들은 칠산 앞바다의 조기보다 크기도 크고, 알도 더 꽉 차 최상품으로 평가받았다( 平井斌夫, 『最近の仁川』, 1912 ; 『역주 최근의 인천』, 인천시 역사자료관, 2008, pp 119~120).
근현대 신문자료들을 통해 그 어획량을 살펴보았다.
○ 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7일) :
“한인이 조기잡이로 매년 10만환 이상 이익을 얻는다.”
○ 매일신보 (1917년 7월 29일) :
“一漁期 産額이 20만원 내외 (鮮魚기준)”
○ 동아일보 (1927년 4월 16일) :
“一漁期에 60만원 돌파. 일본어선 300척, 조선어선 400척 이상, 운반선 등 50척 이상”
○ 조선중앙일보 (1934년 6월 5일) :
“출어하는 어선 1,000여척, 100만원 이상의 어획고를 올린다.”
○ 매일신보 (1936년 6월 28일) :
“어획고가 150만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 약 4~5백 척의 어선이 활약 중.”
○ 동아일보 (1939년 6월 26일) :
“어획고 226만원(전년대비 46만원 증가), 연선척 1,200척. 인천·평양·만주로 수송.”
○ 매일신보 (1943년 4월 24일) :
“금년 예상 목표 700만원 이상”
○ 동아일보 (1946년 6월 4일) :
“현재 어획량 600만관(시가 3억원), 2000여척 선박에 16,000명 어부 동원”
○ 동아일보 (1948년 6월 2일) :
“1,300여척의 어선과 3만명의 어부 동원. 390만관(시가 6억원)의 어획고”
위의 기록들을 통해 볼 때, 일기불순 등의 이유로 일시적인 어획량의 감소나 1934년 태풍에 의한 대조난(大遭難) 등의 참변으로 목표량을 채우지 못한 해도 많았으나, 1910년대부터 1950년까지 연평도의 조기 어획량은 꾸준히 늘어났고, 1940년대에 이르러 정점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1관의 무게가 3.75kg이므로 1946년에는 2만2천500t의 어획을 올린 것이다. 이후 1950~60년대의 어획량은 1만t을 넘나들 정도로 감소된다.
연평도에서 잡은 조기는 진남포, 서울의 마포, 인천 등지로 판매됐는데, 1939년에 발간된 정문기(鄭文基)의 『조선석수어고(朝鮮石首魚攷)』에 따르면 평양(60%), 마포(20%), 인천(5%), 해주(5%), 연백(5%), 진남포(3%), 옹진(3%), 결성(2%), 용호도(1%)로 집산항(集散港)의 비율을 기록하고 있다. 판매지역이 북한지역에 치중됐던 관계로 1945년 분단 이후에는 조기 판로에 일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 번성기의 연평도 파시 풍경
과거 조기의 소비가격은 생활물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흉어로 인한 가격상승은 어쩔 수 없었으나, 산지의 소금난으로 가격이 오르거나, 현대식 안강망으로 설비한 일본어선이 대량 어획한 조기를 어묵재료로 써서 가격이 폭등한 일(『동아일보』1938년 5월 20일, 『매일신보』1938년 5월 28일 기사 참조)도 있었다. 1947년 5월에는 마포로 들어오는 조기배가 줄어들어 조기값이 폭등하자 서울시장이 직접 연평도를 방문해 어부들에게 고무신과 작업복을 나눠주고 마포로 들어오게 한 일이 있을 정도였다(『동아일보』 1947년 5월 21일). 이렇듯 조기는 귀하신 분까지 섬으로 불러들여 선물공세를 하게 할 만큼 상전(?)노릇을 했다.
어부는 조기를 따르고, 작부(酌婦)들은 어부들을 따르고...
풍요속의 가난... 연평도민의 삶
조기들의 회유를 꿈꾸며
<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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