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수립과 인천지역사회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9-03-18 14:32:49
정부수립과 인천지역사회
양윤모(인하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비록 남한만의 단독 정부라고 해도, 유엔이 정한 정식 절차에 따라 수립된 정부다. 무엇보다 총선거(5월 10일), 헌법 제정(7월 17일) 그리고 정부 수립(8월 15일)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절차적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구성된 역사상 최초의 정부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이른바 <of the people, 인민의> <by the people, 인민에 의한> <for the people, 인민을 위한> <정부>라는 원칙을 충분히 구현한 것이다.
특히 5·10선거는 유엔 임시위원단에 의해 합법성을 인정받음으로써 공식적으로 <한반도에서 유일하지는 않지만, 정통성이 있는 정부 수립>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인천에서는 한국민주당으로 입후보한 곽상훈과 무소속으로 입후보했던 조봉암이 초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이 중 곽상훈은 모두 7명이 입후보한 갑구 선거구에서 총 유효표의 약 57%를 획득하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으며, 조봉암은 5명이 입후보한 을구 선거구에서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유효표의 약 38%를 획득,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곽상훈과 조봉암을 포함한 남한의 198명 대의원들은 5월 31일 제헌의회를 구성하고 이승만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제헌의회는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해 논의 끝에 단원제의 국회·대통령제의 행정부·3권 분립주의 그리고 농지의 분배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헌법안을 확정, 7월 17일 공포했다(제헌절). 이에 따라 7월 20일 이승만과 이시영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리해서
1948년 7월 24일 오전 10시 15분 옛 중앙청 광장에서 정·부통령 취임식을 거행함으로써 대한민국은 공식적으로 국제 무대에 정부의 탄생을 알리게 됐다. 이어 1948년 8월 15일 역사적인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게 됐고, 약 3년간 지속됐던 미국 군정도 8월 15일을 기해 폐지됐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실질적으로 행정권을 이양 받은 것은 1948년 9월 3일이었다.
정부 수립과 함께 지방 행정을 효율적으로 재편하기 위해 1949년 지방자치법이 제정됐다. 이 법에 의해 주민들의 정치와 행정에 대한 참여가 거의 완전하게 법적으로 보장돼 있었으나, 여러 정치·사회적인 혼란과 곧 이은 6·25전쟁 등 국내 사정으로 실제적이고 즉각적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인천의 경우 일제 때 부여된 ‘인천부(仁川府)’의 명칭에 변화가 온 것도 바로 이 법에 의해서다. 이로써 일제강점기와 미군정 기간 동안 존속했던 ‘인천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인천시’로 발전하게 됐다. 1949년 5월 현재 인천시 관할 행정구역은 본청을 비롯해 부평·남동·서곶·문학·주안 등 5개 출장소와 111개 동으로 구성됐다.
이렇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인천시가 성립됐지만 정작 인민들의 삶의 질은 고단했다. 아니 오히려 악화됐다고도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해방과 미군정을 거치면서 식민지 경제를 청산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또한 정부 수립 과정에서 노출된 정치·사회적 갈등이 제대로 봉합되질 못했다. 게다가 만성적인 식량 부족과 폭등이 지속됐다. 인천 지역은 해외귀환동포의 증가와 북한 지역에서 피난온 주민들의 합세로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물가의 경우 1947년을 100으로 할 때 1948년도 서울, 인천, 부산, 광주 등 8개 도시의 도매물가지수는 158.3이었다. 1년 사이에 50퍼센트가 오른 것이다. 특히 주민들의 삶의 질을 나타내는 소매물가는 정부 수립을 전후로 해서 인천지역이 다른 지역들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인천상공회의소의 자료를 토대로 보면, 1947년과 1948년도 식료품·의료품·연료 등 주요 생활필수품의 소매지수가 가장 높은 지역이 인천이었다. 이를테면 1947년도 식료품이 가장 비싼 인천과 가장 싼 군산과의 격차는 22퍼센트였고, 1948년도에는 각각 인천과 대전으로 15퍼센트의 차이를 보였다. 연료의 경우, 수송비를 감안하더라도 인천지역은 전국 평균보다 1947년도에는 16퍼센트, 1948년도에는 23퍼센트가 높았다.
의료품은 1947년도에는 부산이 인천보다 비쌌지만, 1948년도에는 인천이 부산과 함께 비싸게 나타났다. 인천·강화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지사인 유봉진이 이승만에게 「헌책상달(獻策上達)」을 보내 물가안정에 대한 대책을 호소했던 이유도 물가가 비싼 이 지역의 실정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한편 일제강점기 식민지 경제의 지역적 특징은 대체적으로 <남농북공(南農北工)>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런데 인천은 비교적 이런 지역적 특징에서 벗어나 있었다. 최초의 국제항이었으며, 일본을 비롯한 외국과의 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됐고, 무엇보다 일제의 대륙침략을 위한 경인지역의 공업화가 집중됐기 때문이다. 대규모 군수공장만 해도 조선기계, 일본차량, 일립제작소, 종지제작소, 조선이연금속 등 155개가 인천에 있었다. 공장 수만 보면 한국인 소유와 일본인 소유가 비슷했지만, 자본면에서는 한국계 약 5퍼센트, 일본계 약 93퍼센트로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해방을 맞게 됐고, 1947년 말부터 미군정에 의해 과거 일본인 소유였던 기업체와 주택, 건물 등 이른바 적산(敵産) 불하가 시작됐다. 인천지역의 경우, 중앙관서 관할업체 27개소와 인천지방관소 관할업체 136개 등 모두 163개에 달했다. 이 중 상공부 소속 업체만 해도 4천500여 명의 종업원이 종사하고 있었다.그렇지만 관리와 운용을 맡았던 일본인들은 멋대로 재고품을 팔기도 하고 매매계약서를 위조하는가 하면 주요시설물들을 파괴하는 등의 행위를 일삼았다. 그리해서 일본인이 떠난 후 관리부실은 물론이고 원료 및 자재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정상적인 가동은 이미 불가능하게 됐다.
대한민국수립 이후 정부는 무엇보다도 경제 재건을 위한 여러 조치들을 강구했지만 만성적인 전력난과 왜곡된 적산 시설의 처리, 제반 인프라의 미비 등으로 경제 생산활동이 원활하지 못했다. 이런 사정은 1948년 12월과 1949년 1월, 2월달 인천지역의 공업활동지수들을 비교해 보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인천상공회의소 자료에 따르면, 먼저 공장수는 141개에서 132개, 142개로, 총생산액은 3억여 원에서 2억여 원, 2억4천800만 원으로, 종업원수는 9천114명에서 8천174명, 7천367명으로 각각 변동됐다. 공장수는 조금 늘었지만, 3개월 사이에 종업원수가 계속 감소하고 있어 생산활동이 크게 부진함을 나타내 주고 있다. 1948년 12월 기준으로 인천지역에서 공업에 종사하는 가구와 인구는 총가구와 총인구의 13.4퍼센트와 13.6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공업에 대한 의존도가 큰 만큼 공업생산 활동의 부진은 곧 인천지역경제의 부진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 자료제공=인천역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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