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 파시(波市)의 추억
仁川愛/인천사람들의 생각
2009-03-25 23:01:37
연평도 파시(波市)의 추억
▲ 유창호 (옹진군지 편찬위원회 전문위원)
# 어부들은 조기떼를 따르고, 물새들은 어부들을 따르고….
파시(波市)란 글자 그대로 물결[波]을 타고 바다에서 열리는 시장[市]을 일컫는 말이다. 매년 11월부터 2월까지 동중국해에서 월동한 조기들은 우리나라 서해안으로 북상해 2~3월에 흑산도, 3~4월에 안마도와 위도를 지나 5~6월에 연평도에 어장을 이루는데, 회유하는 수십억 마리의 조기를 따라 형성되는 시장이 곧 파시인 것이다. 중선배, 안강망배 할 것 없이 갑판 위까지 가득 조기를 싣고 섬으로 들어오면 마포, 개성, 인천, 군산 등 각지의 상고선(商賈船)·운반선들과 뒤섞여 곧바로 판매가 이뤄진다. 1939년 정문기의 『조선석수어고』는 그 풍경을 ‘파시풍(波市風)’이라 부르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매년 춘사월이 돌아오면 연평도와 위도 근해에는 수백 척의 어선이 폭주하야 조기어업의 성황을 이루게 되는데 그 성관(盛觀)은 실로 조선 어업계의 일대이채(一大異彩)이다. 해상에 수백 척의 어선과 수천척의 출매운반선(出買運搬船)이 운집하야 범영액장(帆影扼檣)으로 참차착잡(參差錯雜)되야 통로를 발견키 어렵게 된다. 흡사히 해상에 일대선도(一大船島)를 출현한 것 같은데 야경(夜景)이 더욱 장관이다. 매출선(買出船)의 초치(招致)를 표시하는 어선들의 모닥불이 수면에 반사하여 있는 미관(美觀)은 시인문사(詩人文士)가 아니면 형언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어선들뿐 아니라 1년 내내 조용했던 섬마을에는 선박 수리를 위한 공장과 식구미(생필품)를 위한 잡화점, 그리고 임시우체국과 주재소, 요릿집, 주막, 목욕탕 등의 임시가옥이 세워져 하나의 도시가 생성된다. 일찍이 연평도는 흑산도파시, 위도파시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파시로 꼽힌 곳이다. 가구 수 500호에 3천 명의 인구에 불과한 섬에 260호의 요정·술집이 생기고 물새로 불리는 400명의 작부(酌婦)들이 어부들을 호객(呼客)했다(『우리신문』 1947년 5월 21일).
1931년 5월 7일 동아일보의 기사는 세계공황을 역행하는 기형적인 연평도의 파시 풍경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곳에 처음 오는 사람으로서 가장 인상을 깁게하는 것은 수업시 배치된 토굴(土屈)들이니 경성이나 평양등지에서 보든 빈민(貧民)굴 가튼 것으로 알고 백이다 가는 큰낭패이다. 알고 보면은 선부(船夫)들의 주먼이를 털어볼 작정으로 쟁투하며 모여든 밥장사·술장사·리발업자들의 임시 점포(店鋪)이니 륙지에서는 좀처럼 볼수업는 음분한 분위긔(雰圍氣)가 싸고 잇슴을 우리는 늣길수가 잇섯다.”
매년 2천 척이 넘는 어선·운반선과 수만 명의 어부들이 들어오는 연평도에는 수많은 사건·사고가 일어났다. 전국에서 몰려온 어부들은 요정 색시를 둘러싸고 남북 지역 간의 패싸움을 벌여 전쟁과도 같은 난투를 벌이기도 하고(『중외일보』 1927년 5월 17일), 소주 1되에 1천 원, 쌀 한 말에 680원이라는 고물가로 세상을 놀라게도 했다(『동아일보』 1947년 5월 23일). 그리고 크고 작은 조난사건도 계속됐는데, 특히 1934년 6월 2일에 몰아닥친 태풍으로 300여 척의 어선들이 난파되고 사상자가 200여 명에 달하는 대참사를 기록했다(『조선중앙일보』 1934년 6월 8일). 지금도 연평도에는 당시 세워진 「조난어업자위령비」가 남아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 풍요 속의 가난… 연평도민의 삶
매년 2천 척의 어선들이 몰려 2만t이 넘는 조기 어획고를 기록한 연평도의 그 원주민들 삶은 어떠했을까?
1908년 통감부 농상공부 수산국에서 간행한 『한국수산지』를 보면 당시 대연평도는 170호에 550명의 인구를 가진 섬이고, 소연평·대연평 합쳐 양 섬에서 소유한 어선은 23척이었다. 1930년대에 인구가 1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1940년대에는 3천 명까지 이르렀다. 파시철 해주은행 금고의 돈이 마르고, ‘사흘 벌어 1년 먹고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돈이 흔한 곳이었지만 정작 연평도민의 삶은 힘겨웠다. 1960년대까지 섬의 어선은 운반선을 포함해도 54척에 불과했고, 농사를 짓지 않는 대부분의 주민들은 파시 때 품팔이를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동아일보』 1961년 7월 3일). 코를 찌르는 비린내와 엄청난 파리떼와 싸우며 조기를 말리고, 마을 우물가에서 물을 퍼 부두까지 물동이를 져 날랐다. 하루 종일 물을 길어 날라 봐야 200~300원의 품값을 받는 게 고작이지만, 돈다발을 세는 객주(客主)들과 중개업자 속에서도 꿋꿋이 고향을 지키며 아이들을 교육시켰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조기 파시는 1960년대 말이 되자 조기 어획량이 급격히 떨어지며 막을 내린다. 유자망·기선저인망 등의 어구를 갖춘 대형화된 동력선들의 마구잡이 어획으로 참조기의 씨가 말라 버린 것이다. 1960년대 1만t 가량의 어획을 유지하던 것이 1972년 1천348t, 1973년 288t, 1975년 103t, 1976년 36t으로 급격히 감소된다(『조선일보』 1977년 4월 7일). 조기 파시가 사라지자 연평도의 인구 또한 1967년 3천55명에서 1970년 2천592명으로 3년 만에 436명이나 줄어들었다. 조기가 떠난 섬은 적막함만이 남아 서해의 낙도로 전락하고 말았다.
# 조기들의 회유를 기다리며
조기가 떠난 연평도에 다행히 꽃게가 나기 시작했다. 꽃게 또한 해마나 줄어드는 실정이지만 관계 당국과 주민들의 노력으로 꽃게 어업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연평해전과 같은 남북의 무력 충돌과 중국어선의 불법 어획은 또 다른 그림자로 다가온다. 연평 앞바다에 조기가 사라졌듯이, 청어가 사라졌듯이, 홍어가 사라졌듯이, 꽃게마저 사라지면 안 된다. 지금도 고향을 지키며 모진 가난을 이겨낸 1천500여 주민들을 위해서라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부기:몇 년 전부터 연평도에 크기는 작지만 적은 양의 조기들이 다시 잡히고 있다는 소식이다. 자연환경을 살리고 생태를 복원하는 노력만이 조기의 회유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조기가 다시 돌아온다면 그 이익은 연평도민이 가져가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자료 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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