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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관광,가볼만한곳

인천의 진산 문학산

by 형과니 2023. 3. 14.

인천의 진산 문학산

인천의관광/인천가볼만한곳

2007-01-28 01:14:29


인천의 진산 문학산
 
 인천의 진산 문학산을 역사공원화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문학산은 멀리 백제, 비류의 미추홀을 시작으로 한 인천 역사의 발원지이자, 인천 남부지역에서 가장 넓은 녹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환경·생태적 공간이다. 그러나 도시화에 따른 개발과 무분별한 시민들의 이용에 따른 훼손으로 문학산의 가치는 잊혀져 있었다. 그러던 차에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문학산 살리기에 나선 것이다.

 미추왕능터에서 정상을 거쳐 사모지고개를 넘고 연경정, 노적봉을 내려가 인천시립사격장까지 동서로 난 능선 길이만 6㎞로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많은 시민이 찾는 산. 문학산성과 안관당, 봉화대, 인천도호부, 향교, 학산서원, 선사유적 등 많은 문화유산과 유적이 분포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가치를 느끼며 산행에 나서보자.
 
 문학산은 고을 관아인 도호부청사의 남쪽에 있다 하여 ‘남산’으로 불렸다. ‘학이 날개를 펴고 있는 모양’을 닮아 ‘학산’이라고도 불렀고, 산성이 있다 하여 ‘성산’이라고도 했다. 18세기 이후 이런 유래가 합쳐져 문학산(文鶴山)이라고 했다.

 동사강목과 여지도서에 따르면 고구려 동명왕의 둘째 아들이고,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형 비류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미추홀’이란 이름으로 도읍을 삼았다. 이후 문학산은 인천의 중심지로 자리매김, 그에 따른 유적과 유물이 곳곳에서 나왔다.

 현재 발견된 문화유적은 21곳. 시 기념물 1호인 문학산성이 정상부에 있다. 퇴뫼식 산성으로 백제시대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규모가 작아 정찰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군부대 시설안에 있어 들어갈 수 없다.

 문학산 일대가 인천의 중심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유적으로는 조선시대 쓰인 인천도호부청사가 있다. 시 유형문화재 1호다. 지금은 객사 일부와 19세기 초 건물인 동헌, 연대 미상의 창고만 남아있고 당시의 건물 배치는 알수 없다. 인천향교와 그 앞에 있는 석비군 또한 그 증거다.

 그 주변 조선시대 도읍을 이루고 있던 마을의 형태는 찾을 길이 없다.각종 개발에 따른 결과다. 이같은 현상은 산림생태계에서도 마찬가지라서 안타까움이 앞선다. 산행을 하면서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이 문학산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발견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스럽다.

 건강을 목적으로 한 여느 산행과 달리, 문학산은 건강과 역사 공부가 가능하다. 한가지, 무분별한 산행으로 여기저기 30개에 이르는 등산로가 나 있는데 생태계와 자연환경을 생각한다면 주 등산로만 이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선학역에서 출발, 시립사격장까지 주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선 찾을 수 있는 곳이 미추왕릉터다. 문학산 일대에서 구전으로 전해올 뿐 학술적으로 증명된 바 없다. 청학동 쪽 산 아래 백제우물터 또한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전설일 뿐 확인된 바는 없다. 해안가 사람들의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비류왕이 팠다는 백제우물터는 산 정상과 중턱, 산아래 세군데 있었다고 전해진다.

 정상부에 있는 ‘미사일 통제소’가 더 이상의 발길을 허용치 않아 우회할 수 밖에 없다. 문학산성은 민간이들의 출입이 불가능한 군사시설 안에 있다. 문학산성터에는 백제우물터와 안관당터, 봉수대 등의 흔적이 남아있다. 안관당은 임진왜란때 왜군을 물리친 인천부사 김민선을 모신 사당터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연경정으로 향하는 길목에 고갯길이 하나 나온다. ‘삼호현’ 또는 ‘사모지고개’라 부르는 이 곳은 예전 뱃길을 이용해 중국으로 가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넘는 고개다.

 삼국시대 한강유역을 둘러싼 삼국의 치열한 전쟁이 한창이었다. 당시 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죽이고 승리를 이끌어내지만, 백제와 고구려는 원수지간이 된다. 중국으로 향하는 육로가 막히자 백제는 바다를 통해 외교길을 연다. 지금의 능허대(한나루)가 중국으로 향하던 주요 교통로였고 능허대로 가기 위해선 이 고개를 넘어야 했다. 뱃길이란게 워낙 위험하기때문에 떠나는 이들이 이 고개에서 가족들의 이름을 세번 외쳤다고 해서 ‘삼호현’(三呼峴)이라 했다. 이후 사모지고개라 불렀다.

 지금 사모지고개 지하엔 문학동과 청학동을 잇는 문학터널이 뚫려있다. 이 터널 공사로 학산서원 터가 사라지고 말았다. 학산서원은 인천부사 이단상의 업적을 기리고 인재양성을 위해 1708년 세워졌다.

 사모지고개를 지나 연경정에 오르면 인천 시가지가 한눈에 펼쳐진다. 뒤로는 바다요, 앞으로는 육지다. 환경단체들이 무분별한 산행을 막기 위해 연경정을 중심으로 ‘생태등사로’를 조성했다. 소나무군이 형성돼 있어 향긋한 솔내음이 상쾌하다.
 
  연경정에서 학익동쪽으로 내려오는 곳곳에는 청소년 수련시설이 있다. 무려 30여가지에 이르는 유격훈련식 레포츠 시설이 있는데, 1995년 설치했다. 극기훈련시설과 음수대, 야외무대, 정자 등이 있다. 그러나 청소년들의 이용이 적다. 오히려 산림 파괴란 결과만 불러왔다. 특히 물이 흘러야할, 보존 가치가 높았던 계곡부에 있어 그 훼손 정도가 심하다는 지적이다. 문학산 복원을 추진하고 있는 시민단체에서는 단계적인 철거를 요구하고 있다.

 사모지고개 정상에서 연경정 아래의 약수터로 이어지는 등산로 부근에서 2기의 석관묘가 확인됐다. 또 남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3기의 석관묘가 발견됐다. 이 일대가 청학동 석관묘군이다. 아직 학술조사가 끝나지 않아 어느 때 조성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연경정에서 노적봉으로 향하는 등산로는 정비가 잘 돼 있다. 인천 남부 지역의 최대 녹지대인 문학산의 역사와 생태를 알려주는 안내문이 중간중간 적혀 있다. 역사와 환경을 생각하게 하는 문학산의 가치는 크다. /글·사진=김주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