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방위의 보루, 인천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0-05-31 15:27:32
해양방위의 보루, 인천
평온한 인천 바다에 해일이 일었다. 인천은 우리나라 지형상 북부와 남부의 중간에 위치하고 육지와 해양을 연결하는 지역으로 교통의 요충지이다.
삼국시대 중국과의 최초 해양교류가 인천 능허대에서 시작되었고, 중국 사신의 영접처이기도 했다. 근대에 들어 문화교류에 실제적 영향을 끼친 개항이 제물포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이 바다에까지 미쳤고, 18세기 이래 이양선이 빈번히 출현하는 지역으로 동서양 외부 세력과의 충돌 현장이기도 했다. 평화 시에는 국제교류의 통로로서, 전시에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무력 충돌이 잦았던 것이다.
글 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인천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오랜 세월에 의해 검증되었다. 바다를 통한 중국과의 최초의 개항지가 인천이었고, 능허대 아래의 한나루(大津)을 이용하여 덕적도를 거쳐 산동반도에 이르는 등주항로(登州航路)를 개발하여 중국과 통교하였다.
당나라의 소정방이 군대를 이끌고 기착한 곳도 덕적도였다.
중국 항로의 중간거점이었던 영종도(옛 자연도)는 송나라 사신과 상인들의 내왕이 빈번하여 경원정((慶源亭)이란 객관을 세워 그들을 접대했던 곳이다. 그래서 인천에 속해 있던 영종도는 일찍부터 국제적인 지명도를 갖고 오랫동안 세전될 수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 말 왜구의 선박 130척이 영종도와 삼목도에 침입하여 가옥을 불태우고 노략질을 한 바가 있었다. 당시 영종도와 교동도는 왜구가 집결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서해안 주민의 피해가 커짐에 따라 인천 바다는 전략적으로 그 중요성이 극대화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초기 성창포(城倉浦)에 제물량영(濟物梁營)을 설치하고 수군 만호(萬戶, 종4품 무관직)로 하여금 방비토록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그 위치는 지금의 인천항 일대까지 아우른 지역으로 경기좌수영의 유력한 군항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정부는 사사로이 바다에 나가 이익을 도모하지 못하게 하는 ‘해금책(海禁策)’을 단행했다. 그 결과 인천은 해양을 통해 문화의 다양성을 얻는 기회를 상실하고 평범한 농어촌이 되기도 했지만, 16~17세기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강화를 중심으로 육해군 기지로 변모하여 또다시 왕실의 보장처(保障處)로서 부각되었다.
더구나 병자호란(1636) 이후 인천 월미도는 국방적 차원에서 새롭게 부각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월미행궁이었다. 그 목적은 유사시 인천에서 월미도, 영종도를 경유하여 초지진을 거쳐 강화도로 피신하기 위한 것으로, 기존 김포에서 갑곳으로 향하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청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고착되면서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자 그 역사적 의미는 퇴색되었고 바다는 잠시 평온한 상태가 되었다.
19세기 강화도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주요 격전지가 되었다. 서양 군함의 출현은 조선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는데, 강화와 영종진에서의 방어가 화력의 열세로 좌절됨에 따라 이제 바다는 더 이상 서양세력의 침입을 막는 최전방일 수 없었다.
급기야 인천 연안의 연희·초지진이 설치되기에 이르렀지만, 시대적 추세에 편승하여 서구열강과의 조약을 차례차례 맺어 갔고, 인천은 거의 강압적으로 개항되고 말았다.
그리고 수도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마지막 진지는 부평 계양산의 중심성(衆心城)으로 이동하였다.
근대 개항 후 해양 방위의 실효성을 거두기 위해서 근대 해군의 창설과 장교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의지는 1893년 강화도 갑곶진에 국왕 직속의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을 설립케하였고 매년 50여 명의 생도를 배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근대 해군의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서양 전함의 위력을 뼈저리게 느꼈던 조선은 신식 배를 만들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기울였다. 1903년 4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이 인천항에 닻을 내렸는데 고종은 이 군함의 이름을 ‘나라의 힘을 키운다’는 뜻에서 양무호(揚武號)라 명명하였고, 초대함장으로 근대식 항해 교육을 받은 신순성을 임명하였다.
양무호와 함께 이듬해 서해안 경비를 위해 만들어진 광제호(光濟號)는 대한제국의 상징적인 군함으로 무선전신시설이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일본의 농간에 의해 군함으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가 없었다.
일제강점기의 인천은 그야말로 동아시아의 중심이었다.
항만은 갑문식 도크가 완성됨에 따라 최대의 무역항으로 탈바꿈하였고 나아가 고베와 나가사키, 쓰시마, 부산, 원산, 상하이, 톈진,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잇는 정기 연락선이 오고갔다. 인천 앞바다는 수많은 상선이 즐비한 국제도시로 변모해 갔다.
그러나 광복 후 예기치 못한 현실 앞에 또다시 요동치고 말았다. 6·25전쟁기 미군이 덕적·연평도를 점령함에 따라 인천 앞바다 일대의 여러 섬들이 유엔군과 국군의 점령 하에 들어갔고, 팔미도 등대를 점화하여 월미도를 점령한 연합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하였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그 바다는 남과 북의 대치 상황에 놓여 있고, 백령·연평도 등 서해5도는 항상 긴장해야하는 지역으로 변해버렸다. 인천 앞바다가 오랜 세월 겪어온 숙명같은 역사의 풍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인천의 바다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소명을 다해왔고 그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언제나 대한민국의 고난을 함께 짊어지고 왔다.
그리고 그것은 해마다 새로워지는 인천의 성장 동력이 되었으며 근래에 이룩한 경제적 성과 역시 그 힘이 축적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해양 강국은 우리의 오랜 염원이고 이순신의 신화를 재현하는 것이다. 오늘 인천 앞바다의 긴장을 해소시키기 위해, 지금이야말로 국가적 차원에서 인천의 역사적 공간적 중요성을 되새기고 보다 배려할 때가 아닌가한다.
왜냐하면 인천은 과거 그랬듯이 지금도 국제사회와 더불어 그 역사적 소명을 다할 충분한 저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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