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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문화/인천의영화이야기

잊혀져가는 옛것과의재회-1.옛날극장

by 형과니 2023. 6. 21.

잊혀져가는 옛것과의재회-1.옛날극장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1-10-24 21:00:52

 

잊혀져가는 옛것과의재회-1.옛날극장

인구 30만에 관람객 75경동은 시네마 천국

 

 

영화 도가니가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광주광역시의 한 청각장애인학교에서 벌어진 잔혹스러운 학생 성폭행 실화를 다룬 이 영화는 미처 수면 위로 오르지 못한 묻혀진 진실을 단 한 번의 기회로 세상에 알렸다.

 

이렇듯 요즘 영화의 사회적 파급력이 새삼 주목받고 있는 분위기다.

 

영화는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대중을 압도해 왔다. 특히 영화 한 편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던 195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말까지 대중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이 가운데에서도 개항의 역사를 지닌 인천의 경우 유독 영화에 대한 애착이 컸다. 서울 못지않게 시민들의 영화사랑이 컸으며, 그로 인해 1960년대에는 이른바 개봉극장 홍수시대를 맞기도 했다.

 

그 시절 인천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중·장년층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옛날 극장과 얽힌 추억 하나쯤은 갖고 있기 마련이다. 어느 극장이 외국 영화를 자주 상영했는지부터 어디 극장에 학생들이 자주 드나들었는지까지 물어볼 요량이면 줄줄이 인천극장의 계보를 꿸 이도 여럿이다.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인천의 옛 극장을 돌아봤다.

 

당시를 추억하는 중·장년층과 현재를 살고 있지만 어머니·아버지가 만끽했을 당시의 낭만이 궁금한 젊은 층 모두, 화려했던 그때 그 시절 인천극장 중흥기로 시간여행을 떠나 보자.

 

# 인천 극장의 메카, 동인천 일대

인천 극장의 효시는 어디부터였을까.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중구 경동 238번지에 자리잡고 있는 애관극장이 인천지역 최초의 극장이다.

 

 

애관극장은 1894년께 인천에 세워진 한국인 최초의 활동사진 상설관 협률사(協律舍)로 시작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후 1925년께부터 애관(보는 것을 사랑한다)’이라는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른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정확한 극장 위치에 대해서는 6·25전쟁 당시 소실됐다가 1960년대 새로 현재 위치에 지었다는 얘기도 있다.

 

애관극장은 멀티플렉스 상영관이 각광을 받자 경영 악화에 시달리다 2004년 내부공사를 하고 현재 5개 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명실상부 인천 극장의 산실이자 자존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재는 동인천으로 불리고 있는 인천의 극장가는 1950년 전후로만 해도 경동 시네마 골목으로 더 이름 나 있었다. 194854일자 대중일보(1945년 창간된 인천지역 최초 일간종합신문)에는 동방·애관·문화관·인영 등 4개 극장의 광고가 실리기도 했다.

 

1958년 한 해 동안 인천에서 영화를 관람한 연 관객 수가 무려 755848명에 달했다고 한다. 인천 인구가 당시 30만 명 정도였으니 시민 모두가 1년 동안 두 차례 이상은 영화를 본 셈이다. 그만큼 인천시민들이 영화·연극 예술에 대해 가졌던 애정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경동 시네마 골목의 극장 계보는 어땠을까. 1957년 인천의 극장은 애관·동방·시민관·문화(옛 표관인영·부평극장이 전부였다. 이듬해인 1958년에는 장안·인천·미림·산곡동의 서부극장 등 9개로 늘어난다.

 

 

크기로는 시민관이 가장 커서 1천 석 규모를 자랑했으며 인천극장은 900, 애관극장은 650석 정도였다.그 후 세계·자유·현대·오성극장 등이 앞다퉈 문을 열었다.

 

이 중 현대극장은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 있으며, 오성극장은 애관에 흡수됐고, 자유극장은 도로 개설 때문에 반쪽 건물만 남아 있다.

 

극장이 자리한 곳은 대부분 동인천 부근이었다. 인천시 중구 관동 옛 인천시청(현 중구청) 자리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중구 북성동과 동구 만석·화수·송현동, 남서 방향으로 남구 숭의동 숭의로터리까지가 당시 인천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현 중구 신생동 외환은행 건물에는 키네마극장이 자리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벤허등의 외화를 주로 상영했으며, 그 맞은편에는 동방극장이 있었다.

 

동구 만석동에 천막으로 만든 이른바 천막극장은 6·25전쟁 뒤 봇물을 이루다가 1950년대 후반 대부분 철거됐다.

 

그래도 1970년대까지 현재 동구 화평동 냉면거리에서 화도진에 못 미치는 곳에는 수백 석 규모를 자랑하는 화도극장이 인근 주민을 반겼다.

 

배다리에서 송림동 방향으로 가다 송현시장으로 들어가는 삼거리 초입엔 문화극장이, 현재의 인성여고 체육관은 옛 시민회관으로 간간이 영화를 틀었다.

 

 

 

또한 홍례문 넘어 북쪽으로 이어지는 동구 송현·송림동 피난민 정착지역에는 동시상영을 주로 하는 미림극장이 있었다.

 

이 밖에 항도극장(수문통 중앙장로교회 자리), 인천극장(옛 시민극장), 한일극장(남구 용현시장 후문) 등이 1950년대를 풍미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동인천역을 중심으로 인영빌딩에 인영극장이 운영되다 1970년대 사라졌으며, 인근 인천기독병원 인근에는 인영극장과 이름이 비슷한 인형극장이 등장했다.

 

동구 송림동 쪽 송림로터리에는 현대극장이, 현 중구 신흥동 관광나이트 자리에는 세계극장이, 삼익아파트에서 숭의로터리로 가는 교회 인근에는 자유극장이 세워졌다.

 

동인천뿐 아니라 부평지역에서는 부평역 앞 대한극장, 코아빌딩 금성극장, 백마장 백마극장 등이 자리했다.

 

# 놀이문화가 부족했던 그 시절, 영화는 명절 대목 유일한 문화해방구

전 인천문인협회장을 맡았던 김윤식 시인은 아직도 생생히 당시의 일을 기억해 낸다.

 

 

1950년대 전후로 인천에 극장문화가 발달했던 것은 놀이문화의 부족이 첫 번째 이유로 꼽힌다. 문화를 향유하고자 했던 소위 청년층과 지식인들은 추석이나 설 명절이면 으레 극장 나들이를 유일한 낙으로 여겼다.

 

극장표를 구해도 영화관 안에 들어가지 못해 입석으로 영화를 볼 때가 적잖았지. 그때는 왜 그렇게 영화가 보고 싶었는지 몰래 극장 담벼락을 넘어 들어갔다가 극장 관계자에게 잡혀서 경찰서에 끌려간 적도 많았어.” 김 씨의 회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학교 선생까지 영화 개봉일에는 극장에 나와 단속에 나서기도 했다.

 

한때는 영화를 보러 갔다가 담임 선생님을 만난거야. 죄를 지은 것도 아니지만 학생들 극장 출입을 못하게 했던 때라 거두절미하고 바짝 긴장해서 거수경례를 했어. 그랬더니 선생이 군밤 한 대 주고는 집에 보내주기도 했지.” 김 씨의 옛이야기에 그 시절의 낭만이 물씬 묻어난다.

 

1960년대 후반 동인천 인근에 살았다는 김민국(52·자영업)씨는 이른바 극장 쥐구멍찾기에 달인이었다고 한다.

 

영화 개봉일이 잡히면 관객이 붐빌 때를 기다려 담벼락에 붙어 있는 화장실 통로로 다람쥐처럼 지나다녔어요. 용돈도 없어 영화 볼 수 있는 형편도 안 됐지만 그렇게 온갖 방법을 동원하며 영화를 봤죠. 그런데 대부분 영화가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반공정신을 담은 게 많아서 싱거울 때도 많았어요.”

 

당시 학생들이 볼 수 있었던 공식 영화는 반공영화나 독립군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거의 대다수였다.

 

반면, 당시의 영화를 추억하며 이경서 인천언론인클럽 사무처장은 현재의 디지털 영화에 대해 아쉬움을 전하기도 한다.

 

최근에 디지털 영화관을 가 봤는데 옛날 영화처럼 시원한 맛이 없더라구요. 명쾌하지 못하다고 해야 할까. 당시는 16, 30등 필름으로 영화를 찍어 왠지 화면이 꽉 찼다고 해야 할까요. 물론 당시의 향수가 짙게 남아 이런 느낌이 들 수도 있겠네요. 영화 한 편 보기 위해 몇 달을 기다렸으니

 

 

 

# “옛 추억을 떠올려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

현재 인천에는 CGV, 롯데시네마, 시너스 등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즐비하다. 애관극장, 대한극장, 주안 영화공간 등이 향토극장으로서 명맥을 어렵게 유지하고 있다.

 

아버지가 인영극장을 운영했으며, 자신은 훗날 동인천극장을 운영한 김보섭 사진작가는 시대의 흐름을 원망하지 않는다.

 

옛날식 극장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고, 당장이라도 상영관을 세우고 싶지만 모두 옛 추억일 뿐이에요. 모두들 아련했던 옛사랑을 한 번쯤은 떠올리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옛사랑을 다시 찾지는 않듯이 그저 제 마음속에 아버지가 일구고, 제가 새로 냈던 극장은 모두 가슴 한구석에만 남겨져 있어요. 그저 이렇게 옛 추억을 떠올려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죠.”

 

한때 유행처럼 번져 인천에도 2곳이나 운영됐던 자동차극장도 모두 문을 닫았다. 송도 자동자동차극장으로 불렸던 카네마극장(송도유원지)과 인천자동차극장으로 알려진 씨네파크(동구 송현동 현대제철 앞)가 그 주인공인데 모두 2000년도 안팎에 문을 열었으나 현재는 손님을 받지 못하고 있다.

 

몇 남지 않은 향토극장 관계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극장을 꾸리는 시기는 지났다고 입을 모은다.

 

거대 자본에 맞서기 위한 묘안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대형 멀티플렉스와 상업영화 경쟁에 나서기보다는 영화를 사랑하고 문화를 향유하고 싶은 지성인들을 위해 마음의 안식을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게 이들의 하나같은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