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영동- 창영학교 소풍가는 날은 비 오는 날
인천의관광/인천가볼만한곳
2011-12-23 13:35:48
창영학교 소풍가는 날은
비 오는 날
기찻길 옆 오막살이. 창영동은 지난 한 세기 동안 경인선 기찻길과 함께 해 온 동네다. 개화를 알리는 기적(汽笛) 소리에 잠을 깨며 한동안 신식 동네로 살아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었지만 묵은 것만 움켜쥐고 바튼 기침만 하던 이 동네가 하마터면 큰 수술을 받을 뻔 했다. 박제가 돼 가던 이 동네에 불어 닥친 개발바람은 호불호의 논쟁을 일으키며 오히려 관심과 활기를 불어넣었다. 한동안 수면무호흡증에 빠져있던 동네는 이제 다시 기지개를 펴고 있다. 인천의 자존심을 지키며 나잇값 하는 ‘꼰대’로 다시 돌아오고 있다.
글 유동현 본지편집장 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장면1
풍랑을 헤치고 온 기선(汽船)이 아침 일찍 제물포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조그만 배들이 기다렸다는 듯 큰 배를 에워싸고 사람과 짐을 옮겨 싣는다. 제물포 포구에 내린 벽안(碧眼)의 이방인은 조랑말 한 마리에 올라탄다. 고삐를 잡은 조선인 말잽이는 서둘러 포구를 벗어나 가파른 언덕으로 길을 잡는다. 갯벌 냄새가 좀 가시나했더니 이번엔 인분 냄새다. 언덕 밑에서 청국인 옷차림을 한 농부들이 밭에 거름을 뿌리고 있다.
길가 곳곳에 싸리나무가 무성하다. 길은 좁은 내리막길로 이어진다. 바닷물이 들어 왔었는지 질퍽하다. 갈매기 두어 마리가 갯골 위를 배회한다. 납작하게 엎드린 초가집들 옆으로 큰 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흰 무명끈을 머리에 질끈 맨 노무자들이 네 명이 한 조가 돼 기다란 쇳덩이를 옮기고 있다. 철길을 놓는 것이다.
마치 쇠뿔처럼 생긴 언덕길을 힘들게 오른 말잽이는 잠시 숨을 고른다. 뒤돌아보니 멀리 앞바다에 정박한 기선 굴뚝에서는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이방인은 말잽이에게 가던 길을 빨리 가자고 눈짓을 한다. 서두르지 않으면 한양 성문이 닫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내 말머리는 동쪽 길로 향한다. 몇발자국 떼자 이제는 민가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장면2
곳곳이 폐허가 되었다. 다행히 학교와 교회 그리고 여선교사집은 포탄 세례를 용케 피했다. 송림학교 앞 넒은 공터에는 매일 큰 장이 섰다. 이북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돈될 만한 것들을 갖고 나와 좌판을 차렸다. 옆집의 순이는 어제부터 엿판을 목에 걸고 시장으로 나갔다.
어디선가 지금껏 맡아보지 못했던 색다른 냄새가 흘러들었다. 아침부터 철도길 옆 공터에서는 큰 무쇠 솥에 죽을 끓였다. 깡통과 바가지를 든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걸쭉한 죽을 받아 든 사람들은 철길에 걸터앉아 허겁지겁 들기 시작했다. 돼지고기 맛 같기도 한 오묘한 맛이 꿀맛이다. 마시다시피 하는데 갑자기 뭐가 씹혔다. 담배꽁초다. 다행히 오늘은 한개만 씹혔다. 깡통 바닥이 보일쯤 철길이 흔들렸다.
요란한 기적을 울리며 시커먼 검댕이 연기를 내뿜고 탱크를 실은 화물기차가 서울 쪽으로 지나갔다. 철교 밑에 헌책방이 생겼다. 책을 읽은 지 얼마만인가. 콘사이스를 한 권 살 겸 그곳으로 향했다. 벌써 소문이 퍼졌는지 책방 안에는 발 디딜 틈이 없다. 쉴 새 없이 고물 아저씨들이 책방 앞에 손수레에서 책을 내려놓았다.
장면3
하루 종일 포클레인의 굉음소리가 마을을 뒤흔들었다. 이미 보상을 받고 떠난 이웃의 빈집들이 거대한 삽날에 힘없이 내려앉았다. 소문에 의하면 산업도로가 마을 한가운데로 난다고 했다. 수인역을 지나 철교 밑으로 해서 수도국산을 뚫고 나간다고 한다. 그 시커먼 터널 속으로 배다리 영혼이 빠져 나갈지 모르는데….
헌책방을 운영하는 곽씨 아줌마와 의상실 박씨 아줌마를 중심으로 배다리 사람들이 모였다. 얼마 후 구월동에 있던 문화공간 스페이스빔이 비어있던 양조장 건물로 들어왔다. 이를 계기로 산업도로 개통 반대운동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도로는 바리깡 지나간 것처럼 흉물스럽게 남게 되었지만 끝내 개통은 무산되었다. 최근에 다행공방, 아침햇살 같은 문화공간과 한점갤러리, 뫼비우스 띠 등 작은 갤러리들이 문을 열면서 배다리 일대가 ‘삐까번쩍’ 해졌다.
이제 머지않아 한 학년 전체가 야구부원이 되어야 야구부가
해체되지 않을 정도로 창영에는 아이들이 별로 없다.
류현진의 후예들
산업도로가 관통할 뻔 했던 창영동은 인천의 근대역사가 관통하는 곳이다. 1899년 경인선 철도가 놓이기 전 제물포항에서 서울을 가려면 이 길을 거쳐야 한다. 개항후 포구에서 싸리재 거쳐 배다리 옆을 지나 쇠뿔고개로 가는, 이름하여 경인가도(京仁街道)다. 사람들이 오고가다보니 낯선 풍경의 집들도 들어섰고 별난 이야기도 만들어졌다.
창영초등학교는 인천 최초로 조선 어린이들을 가르치고자 1907년 ‘인천공립보통학교’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고 1910년 3월 18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현재도 건재하고 있는 빨간 벽돌의 교사(校舍)는 당시 교육을 열망하는 조선인 유지들이 정성껏 모금한 2만원을 밑거름으로 1922년에 완공했다.
70년대 말까지 창영동이 인천의 중심지였기 때문인지 창영학교 아이들은 송현동, 만석동 등 변두리 아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얼굴색이 좋았다. 부잣집 아이들만이 할 수 있는 고적대와 야구부 등이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창영학교 소풍날은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징크스가 계속되다보면 ‘설화’가 만들어지는 법. 우물을 팔 때 용을 죽였다는 혹은 소사 아저씨가 막대기로 용의 꼬리를 쳤기 때문에 그 용이 원한에 사무쳐 저주를 내린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변두리 학교 아이들에게는 창영학교 아이들의 이런 불운을 보면서 자신들은 참 좋은 학교에 다닌다고 애써 자위하곤 했다.
맑은 햇살이 빨간 벽돌건물을 선명하게 비춘 늦가을 날, 창영학교를 찾았다. 야구부가 함성을 주고받으며 운동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학교 담벼락에는 ‘대한민국의 에이스 류현진의 모교 창영초 야구부원 모집’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세월은 흘렀어도 여전히 부러움의 대상이다. 문제는 학생 수다. 많을 때는 한해 1천명 이상이 입학했다. 올해 입학생 수는 40여 명. 이제는 야구팀 하나 채우기가 벅찰 만큼 아이들이 없다. 창영은 소풍날의 징크스가 있던 그 시절이 못내 그립다.
빌라에 둘러싸인 여선교사 사택. 마치 제복을 입은 군인들 틈에 레이스 달린 드레스를 입은 처녀의 모습이 연상된다.
에즈버리 동산 위 파란 지붕
창영학교 옆으로 영화학교가 있다. 미국인 처녀 마거릿 벤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녀는 1891년 22세 때 평양을 건너 조선으로 건너 왔다. 그녀를 마중 나온 존슨 목사는 당시 내리교회 담임목사였다. 인천으로 온 벤젤은 당시 내리교회 한국인 전도사의 딸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교육기관 영화초등학교의 출발이다. 출발부터 어려움이 많았다. 서양인이 어린이의 간을 약에 쓴다는 흉흉한 소문에 초기 학생 수는 남자 3명, 여자 2명뿐이었다. 싸리재에 있던 학교는 1911년 현 위치에 2층 벽돌집 교사를 마련해 이전했다. 이 건물은 올해로 딱 100년이 되었다.
창영교회 옆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다. 존스목사는 이곳을 ‘에즈버리 동산’이라고 불렀다. 1893년 선교기지를 세우기 위해 이 일대의 땅을 매입해서 지금의 동인천세무서 자리에 남자선교사 사택을 지었다. 그 옆에는 안데르센 동화책에서나 나올법한 고풍스러우면서도 앙증맞은 여선교사 사택을 지었다. 지상 2층, 지하 1층에 건평 469㎡(142평) 짜리로 마루가 깔린 복도를 따라 아래 윗층에 각각 5개의 방이 있다. 지하에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던 보일러 시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30년 이상 단골 손님을 모델 삼아
패션쇼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박의상실 사장 박태순씨.
실패처럼 도는 내 인생
‘미싱이 돌아갈 때 실이 실패에서 풀려나가듯 인생도 자연에 순응하며 그렇게 흘러가는 것. 어떤 모양으로 풀려나갈지 박음질이 되어질지, 그 숙제는 우리가 푸는 것…’ 창영동 길 중간쯤에 있는 박의상실 쇼윈도에 써 있는 글귀다. 의상실 주인이 궁금해 불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느질 인생에 대한 제 이야기이자 소회죠” 박태순(60) 씨는 6번지, 3번지, 9번지 등 창영동 골목에서만 40년 넘게 바느질을 했다. 1976년 당시 인기직장이었던 동일방직에 취업하려고 했는데 키가 작아 떨어졌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키는 155㎝. 거기에서 딱 1㎝가 모자랐다. 친구와 함께 양재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배다리에 ‘미스박 의상실’이란 간판을 걸었다.
동생 뒷바라지 때문에 결혼도 안하고 돈을 벌 요량이었다. 처녀가 결혼 안 한다는 말은 거짓말 중의 거짓말. 그는 결혼했다. 그래서 슬그머니 간판에서 ‘미스’를 지워버렸다. 함께 오랜 세월을 보낸 사람들은 골목만 늙어갈 뿐 자신들은 서로 늙지 않은 것으로 착각하는 지 아직도 삼성서림 사장님은 그녀를 ‘미스 박’이라고 부른다.
“한때 이곳은 일류는 아니지만 골든의상, 정의상, 르네의상 등 대여섯 개의 의상실이 있었어요. 지금은 단골 10여 명의 옷만 만들 정도예요” 한창 때는 미싱사 등 4, 5명을 두고 하루 3벌을 만드느라 밤새기 일쑤였다. 박 사장은 중구 사동에 살았는데 10살 때 집이 철거돼 송림3동에서 살았다. 이런 아픔 때문인지 길을 뚫기 위해 집들이 철거될 때 맨 앞에 서서 반대했다. 그는 배다리에서 그의 실패가 다 돌아갈 때까지 일하고 싶은 소망을 갖고 있다.
“우리집이 동인천 대한서림 다음으로 오래된 책방이야”. 헌책방거리에서 60년간 ‘집현전’이란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오태운(85) 사장. 헌책방 거리는 6·25 전쟁 직후 폐허가 된 거리에 이동식 리어카 책방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시작됐다. 1960년대 서울 청계천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헌책방 거리가 형성됐다. 오 사장은 영어 관련서적을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 학생들의 성화에 못 이겨 미군부대 등을 돌아다니며 헌책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면 책을 사려는 학생들이 책방 앞에 줄을 섰다.
“1960, 70년대 줄을 서 책을 구하려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미래가 밝겠구나 생각했지요. 하지만 요즘 학생들은 참고서 외에는 책을 찾지 않아 그게 안타까워.”
헌책방 가게의 주인들은 이제 헌책만큼이나 긴 인생을 보냈다. 최근 삼성서림과 국제서림이 가게를 내놓았다. 이제 머지않아 헌책방 거리는 그들과 함께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질지지도 모른다.
토끼고기의 추억
책방거리 뒤쪽에는 배다리 큰 도로와 이어지는 좁은 골목이 하나 있다. 방값이 싸 요즘 외국인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길조여인숙이 나온다. 6,70년대 전형적인 여인숙의 모습인 이 집 벽에는 한 달 이상 숙박하는 손님을 위한 ‘달방’이 가능하다는 종이가 붙어 있다.
그 옆에 ‘대인상회’라는 간판이 붙은 오래돼 보이는 2층 건물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데 한때 쌀을 크게 취급했다고 한다. 지금은 1층에 토시살 숯불구이집이 자리잡고 있다. 황인순 할머니(78)는 황해도 은율 출신으로 1·4후퇴 때 피난 내려왔다. 처음에는 빈대떡, 되비지 등을 팔았지만 이 집이 한때 유명세를 치른 것은 토끼고기를 팔았기 때문이다. 토끼뿐만 아니라 오리, 참새, 꿩 등 날개 달린 거의 모든 조류가 그곳에서 요리되었다. 지금은 손자 고원기(36)씨가 할머니와 함께 토시살 등을 팔고 있다.
“우리는 개발을 원해요. 비만 오면 물이 줄줄 새요.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 이 동네에서 먹고자는 사람 별로 없어요. 우리에겐 생존인데 그들에겐 그게 문화래요.”
사라진 흔적의 덧없음과 사라지지 않은 흔적의 견고함이 겹쳐진 창영동에서는 모든 게 인천 역사의 ‘밑줄 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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