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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연구,자료

경인철도가 생기기 전에 서울과 제물포를 오가는 방법과 경로

by 형과니 2023. 6. 23.

경인철도가 생기기 전에 서울과 제물포를 오가는 방법과 경로

 

[경인가도(京仁街道)와 마포 및 용산]종전 경성(京城)에서 육로(陸路)로 인천(仁川)을 향하는 여객(旅客)은 본도(本道, 큰길)로서 서대문(西大門)에서 아현(阿峴)을 거치거나 또는 남대문(南大門)에서 만리재(萬里峴)을 거치며, 간도(間道, 샛길)로서는 청엽정(靑葉町, 청파동)에서 현 선린상업학교(善隣商業學校)와 효창공립보통학교(孝昌公立普通學橋) 양교의 중간에 있는 고개를 지나 조선서적인쇄회사(朝鮮書籍印刷會社)의 뒤편으로 나가서 마포용산간(麻浦龍山間)을 가로지르는 소구릉(小丘陵)의 고개를 넘어서 한강을 건너는데, 오류동(梧柳洞)으로써 경인간의 중간휴게지로 삼았다.

 

그리고 어느 경우에도 꼭 마포를 통과하여 여의도(汝矣島)를 횡단했던 것이다. 다만, 큰물이 질 때에는 도강의 편리상 양화진(楊花鎭)을 경유했다. ()로 경인왕래자(京仁往來者)가 용산을 경과했던 것은 단지 결빙기간(結氷期間)뿐이었으므로 마포는 경성과의 교통을 움켜잡은 중요한 지점이며, 그 번영은 멀찍이 용산의 위에 있었다.

 

당시 경인간은 도보(徒步) 외에는 승마(乘馬) 및 교여(轎輿, 가마)에 의하는 것밖에 없어 그 임전(賃錢, )은 승마는 별당부첨(別當附添) 왕복 350, 편도 250, 타마(馱馬, 짐싣는 말)3관 오백문(18)이고, 교여는 작은 것도 4명이 필요하여 교부(轎夫, 교꾼, 가마꾼) 1명에 3관문(93)이며, 또 전부 한강도선임(漢江渡船賃, 나룻배삯)으로 50(2)을 지불하게되나 시간은 약 12시간이 걸리는 불편이 있었다. 그러다가 각국의 선박(船舶)이 내항하기에 이르러 용산은 마포에 대신하여 경성교통의 요충이 되어 양자는 그 위치가 전도되는 것은 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자료 : <경성부사> 2(1936) pp.1004~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