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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연구,자료

김 흥산 - 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

by 형과니 2023. 6. 23.

김 흥산 - 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2-02-27 11:12:03

 

김흥산(金興山). 1906~?

연주가·작곡가. 1906년에 경기도 인천에서 태어났다. 성장 과정에 대한 상세한 이력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략 1920년대 후반에 일본으로 건너가 5년 동안 작곡을 연구하고, ‘후스라는 외국인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고 한다. 김흥산의 이름이 대중음악계에 처음 등장한 때는 193310월 무렵으로, 당시 그는 방송국 대중음악 프로그램에 기타 반주자로 출연을 했다. 이어 1934년에는 콜럼비아(Columbia)레코드에서 <무심>이라는 곡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아직 다른 작품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작곡가로서는 크게 활동하지 못한 듯하다.

 

1938년에는 오케레코드 전속 C.M.C악단 멤버로 활동하고 있었고, 작곡가 박시춘(朴是春)과 함께 기타를 맡았으며, 기타 외에도 바이올린과 전기기타를 잘 연주했다. 그런데 당시 기사에서는 그를 漢陽人 사나히 三十라고 소개했는데, 이는 다른 기록에 나타난 그의 이력과 다소 차이가 있다. 일제시대 신문에서 나이가 잘못 소개되는 예는 흔히 발견되므로 그냥 넘길 수도 있지만, 다른 기록에서 모두 인천 출신이라고 되어 있는 그를 서울 사람으로 쓰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단정할 수는 없으나, 인천에서 출생한 뒤 어린 시절에 서울로 이주해 성장했기에 그런 표현을 썼을 가능성도 있다. 이후 이력으로는 19433월 당시 라미라(羅美羅)가극단에서 음악 담당 스태프로 참여한 정도가 확인된다.

 

주로 연주가로 활동을 한 일제시대와 달리, 광복 이후 김흥산은 다른 방식으로 대중음악계에 다시 등장을 하게 된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7월에 스타(Star)레코드가 제1회 작품으로 <슈샨 보이>, <삼다도 소식>, <승리 부기>, <바로 그날 밤> 등을 발표했는데, 스타레코드를 설립한 사람이 바로 김흥산이었다. 부산에서 제물포악기점을 경영하고 있던 그는 손영준(孫泳俊)이라는 사람과 함께 음반 제작을 기획했고, 전쟁 직후라 국내 여건이 좋지 않았으므로, 녹음은 부산에서 하고 음반 프레스 작업은 일본에 위탁하는 방식으로 음반을 생산했다고 한다. 스타레코드는 휴전 이후 새로 등장한 음반회사 가운데 제1호로 꼽히는 곳이다. 김흥산이 운영하고 있던 제물포악기점은 스타레코드 광고에도 총판매점으로 등장하고 있으므로, 그가 인천 출신이라는 사실을 방증하는 자료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스타레코드가 이후 언제까지 음반을 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 다만, 음반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오랜 기간 존속한 것 같지는 않다.

 

그 때문인지 김흥산은 음악활동의 방향을 다시 바꾸어 195710월에 대한농아(聾啞)리듬교육연구소를 창설하고 농아연주단을 조직해 이끌었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부족했던 당시에 그가 장애인 음악교육의 중요성을 선구적으로 인식하고 지속적인 활동을 했다는 것은 상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일제시대 어린이운동에 앞장섰던 방정환(方定煥)을 기려 제정된 소파상(小波賞)이 대중음악가로 활동했던 그에게 1964년 수여된 까닭은 그러한 공적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활동상과 사망에 관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