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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연구,자료

인천의 근대도시계획사

by 형과니 2023. 6. 24.

인천의 근대도시계획사

仁川愛/인천이야기

2012-03-04 17:15:19

 

인천의 근대도시계획사

 

김용하 선임연구위원(인천발전연구원 도시계획연구실)

지난 223일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로부터 제23회 학술상을 수상한 인천의 도시계획사는 인천광역시의 지원에 의해 우리연구원 김용하 선임연구위원의 연구책임 하에 이루어졌다. 정책현안을 다룬 연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지원을 해준 인천광역시 도시계획과와 인천광역시의회에 감사드린다.

 

인천이란 도시는 우리나라 근대도시역사상 초창기도시로 120년의 역사를 지닌 도시이다. 도시의 역사는 내외적으로 복잡한 조건에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과 정체를 반복한다. 인천도 시 역시 예외는 아니다. 개항이후 120년동안 우리 나라 근대사와 맥을 같이하면서 국가 경제개발에 앞장서 왔다. 신개척지, 다양성과 개방성을 가진 희망의 도시였으나 전후 남북분단 및 중국과의 단교로 긴 시간 막장도시로 전락했다.

 

그러나 세계평화무드와 함께 중국의 개방과 남북간 정상회담(2000.6), 서울 아시안게임(1986.9)과 서울 올림픽개최(1988.9) 이후 인천앞바다에 다시 활기가 돌고 있다. 인천항을 통해 중국행 여객선과 컨테이너선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세계 각국의 항공기가 시시각각 들고 나가고 있다. 현재 국가운명을 걸고 추진중인 경제자유구역이 성공적으로 개발되면 경제자유도시로 외국기업과 외국인이 선호하는 국제도시가 될 것이다.

 

도시역사를 통해 본 인천은 우리나라 근대 도시계획사에 있어서 실험도시(實驗都市)로 압축할 수 있다. 바다와 하늘, 섬과 육지, 농촌과 도시, 항만과 공항, 갯벌의 자연적 요소와 개발의 인공적 요소가 어우러진 종합도시이다. 21세기 인천은 종전 육지의 끝이 아니라 우리 나라가 세계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디지털시대 도시의 성장과 정체의 사이클은 점점 좁혀지고 있다.

 

2004년 출간된 인천의 도시계획사는 총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보고서에는 개항이후 2001년까지 크게 1945년 전후로 구분하고, 다시 10년단위로 세분하여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요약본는 국문판과 영문판으로 도시계획, 도시개발, 도시시설을 중심으로 정리하였으며, 도면집은 도시계획도, 해도 지형도, 시가지도를 시대별, 주제별로 정리하여 본보고서와 요약본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편집하였다. 그리고 연혁집과 목록집은 도시계획결정에 대한 변경사항을 총정리한 것으로 실무 공무원에게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다. 그럼 인천의 도시계획사의 내부로 잠시 들어가 보겠다.

1883-1945(근대도시로의 시작)

 

인천이 근대적 도시로서 출발한 것은 부산(1876), 원산(1880)에 이어 1883년 인천 제물포(濟物浦)가 개항된 이후이다. 구한말 문호를 개방했을 당시 부산과 원산은 일본에 대한 무역항 및 군사항이었는데 비해 인천항은 다국적 정치,외교,통상을 위해 개항되었고, 수도 서울의 관문이라는 입지조건으로 해서 다른 지방보다 먼저 근대도시로 출발하였다.

 

개항초기 인천에는 정부와의 외국인 조계지조약(租界地條約)에 의해 일본과 청국, 그리고 각국인을 위한 전용 주거지가 인정되었고, 조계지에는 서구식 가로계획이 도입되었다. 항구를 가진 관문도시로서 세관의 설치, 전통적 건물과는 다른 양관과 공공기관, 부두, 공원,묘지, 상수도 등 도시시설, 인천,서울간 철도부설 등 교통시설로 형성된 새로운 시가지가 현재 구시가지의 골격이 되었다. 개항후 인천과 서울간의 관계는 1899년 개통된 경인철도로 인해 시.공간적으로 가깝게 되었다. 1910년 한일합병이후 일본인 주도의 해안매립과 항만도크축조, 임해공장과 군수공장건설로 인천은 항만,공업도시로 변모하였고, 지금의 도시성격을 결정짓는 주요인이 되었다. 1936년 인천인구는 약10만명으로 1937년 최초로 인천도시계획이 수립되었다. 계획목표연도는 1965년에 인구 20만명을 수용하는 계획이었다. 도시계획면적 27.5에 대해 가로망과 도시시설, 구획정리사업지구, 용도지역을 처음 지정했다.

1962-1971(공업도시로 육성)

 

60년대는 경제개발계획의 추진과 함께 공업화, 수출지향정책에 의해 부평,주안수출산업단지 조성(1965), 경인고속도로 개통(1969), 내항 도크공사 재개(1966-1974) 등으로 공업도시로 각인된 시기이다. 염전과 해안을 매립하여 북성동, 용현,학익동에 공장들이 입지하였다. 또 경인공업지역의 공업용 원자재 수입항으로써 도크확장공사가 이루어졌다.

 

인천은 1966년 인구50만명으로 서울, 부산, 대구에 이어 가장 많았다. 인구증가에 따라 택지조성을 위해 주안, 부평지구에 토지구획정리사업이 활발히 시행되었다. 그 결과 북구는 부평을 중심으로한 공업지역으로, 남구는 주안을 중심으로한 주택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1982-1991(도시공간구조의 재편과 정비)

 

19817월 직할시로 승격되었고, 1982년은 인천개항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인천은 수도권의 대표적 공업도시로 최고조에 달했다. 1984년말 산업구조를 비교해 보면 제1, 2, 3차 산업이 각각 2.8%, 52.4%, 44.8%, 기계,금속,화학 등 중화학공업이 제조업전체 70%를 차지하는 공업중심도시로 변모하였다.

 

고도 경제성장으로 수도권으로의 인구 및 산업의 집중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도권정비계획법(1982)이 제정되었다. 인천은 제한정비권역에 포함되어 대학, 국가기관청사, 대규모 상업시설, 공장 등 신규입지를 제한받았다.

 

1981년 도시계획법 개정에 따라 도시기본계획수립 제도가 도입되었다. 직할시로 승격한 인천시는 21세기를 향한 도시장기종합계획을 수립하여 1984년 도시기본계획을 확정했다. 이때 도시계획구역은 326.1로 송도해면매립(지금의 송도경제특구)과 서북부 해안매립(지금의 청라경제특구) 계획이 반영되었다. 두 번째 도시기본계획은 1991년에 수립되었다. 옹진군 영종면 및 용유면과 김포군 계양면이 편입(1989)되고, 율도주변의 대규모 해안매립(현재의 청라경제특구)이 완공단계로 행정구역이 확장되었고, 송도신도시, 영종 신국제공항, 인천지하철 건설계획을 반영하기 위해서 수립된 것이다.

 

인천은 그동안 공업도시, 공업항으로써 비약적인 도시발전을 해왔으나 수도권정비계획법에 의해 침체위기에 직면했다. 이것을 계기로 21세기 인천의 도시기본목표를 관광위락도시, 수도권의 국제공항 및 해상관문도시로 정했다. 이때 도시계획구역은 공유수면을 포함하여 975.9였다. 이러한 인천시의 주요사업을 계획하고 집행하기 위한 전담부서로 공영개발사업단(1989.3)과 도시전철건설본부(1991.12)가 설치되었다.

 

 

원문이 필요한 독자들께서는 인천광역시 홈페이지(http://www.incheon.go.kr)와 우리 연구원 홈페이지(http://www.idi.re.kr)에서 전자문서의 형태로 된 책자를 다운로드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