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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옛모습

경성·인천 전화번호부

by 형과니 2023. 6. 29.

경성·인천 전화번호부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8-02-05 22:09:32

 

 

경성·인천 전화번호부

소장 유물 1930, 12.8×18.6×1.3cm

 

 

 

휴대 전화기가 우리 생활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게 되면서 이전과는 달라진 풍경이 많다. 때문에 불과 20년 전의 일상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중에는 더 이상 눈에 잘 띄지 않게 된 전화번호부에 대한 기억도 있다. 지금이야 손 안의 휴대 전화기에 저장되어 있거나 인터넷으로 손쉽게 검색되는 전화번호로 연락한다지만 예전에는 좀 더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관공서나 주요 기관, 상호 등을 직업별로 게재하거나 가나다순으로 가입자의 이름을 올려놓은 두터운 전화번호부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번거로움은 오늘의 우리 생각일 뿐이다. 처음 전화가 생기고 전화번호부를 접한 사람들에게는 놀라울 정도의 편리함과 생각지 못한 정보를 제공했을 터이다.

 

전화번호부가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발행되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1908년 통감부령으로 시행되었던 <전화규칙>의 규정 등에 미루어 최소한 1910년대 초부터는 발행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 유물은 19306월 경성중앙전화국에서 발행한 경성·인천 전화번호부이다. 경성과 인천 지역의 전화번호를 경성 295, 인천 39, 기타 50쪽으로 구성하였다. 가격은 27전으로, 판매용으로 제작된 것이다. 전화번호에 대표(), 명칭, 주소, 업종 및 직업 등이 기재되어 있어 전화 가입자의 정보를 일부 파악할 수 있다. 인천의 전화번호는 1,097건으로 0번에서 1147번까지 있으며 51건이 누락되었다. 1,000건이 넘는 인천의 전화번호는 지역번호 등이 구별되는 오늘날 전화번호와 달리 그 자체로는 어느 지역의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전화번호 패턴에서 당시 진행된 인천의 도시계획, 행정구역에 따른 규칙성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모든 전화번호에는 정(), ()로 주소를 표시하여 1930년 인천부의 행정 구역별로 전화 가입자 소재지가 잘 드러난다. 이를테면 당시 인천부 총 51개 행정동 중에서 정목(丁目)으로 구분한 지역을 통합해 보면 본정, 궁정, 해안정, 신정, 항정, 빈정, 중정 등 지금의 중구 일대에 주소지가 집중 분포되어 있음이다. 이 최대 밀집 지대이자 중심지를 둘러싸고 인접한 지나정, 산수정, 내리, 외리, 사정 등의 지역까지 무지개 모양으로 가입자 수의 분포도가 높다. 일제 강점기 인천부에서 본정은 인천의 중심가로, 중정은 행정가, 빈정과 궁정은 번화가로 존재하였으며 내리 등은 조선인 부유층이 살았던 곳이다. 따라서 전화 가입자가 많은 행정 구역의 파악을 통해 거꾸로 도시 인천의 지역 성격을 재확인할 수 있다.

 

전화번호에 부기된 가입자명과 직업정보는 전화를 사용한 사람들의 민족적, 직업적 특성과 함께 이들이 자리한 행정 지역과 어떤 상호관계가 있는지 보여준다. 전화 가입이 두드러진 지역은 대개 일본인이 많이 살거나 가입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 및 직업적 성격과 밀접한 거주지, 상점(회사)입지로부터 파생된 공간이 많다. 특히, 정미업, 미곡상, 요리점, 취인소(取引所) 중매점, 운송업 가입자가 많은 편인데, 이는 전국 미곡의 집결지이자 미곡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항구 도시로서 인천부의 특성과 맞물린 결과다. 예를 들어 취인소 중매점 가입자는 인천 미두취인소가 해안정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해안정과 본정에 상당수 존재하였다. 운송업 가입자가 본정, 항정, 해안정, 빈정 등에 있던 것은 상품을 실어 나르는 물류업의 특성상 중심가와 인천역, 인천세관 및 축항 근처와 같은 교통 시설 주변에 분포했기 때문이다.

 

전화번호부는 현재 진행형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가까운 과거의 부산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화번호부가 근대 인천의 도시 모습을 오늘에 되살리는데 작은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 바로 박물관의 유물을, 자료를 찾아보는 재미가 아닐까. ·안성희(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