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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인물

그리운 금강산 / 한상억

by 형과니 2023. 7. 6.

그리운 금강산 / 한상억

인천의문화/인천배경책과영화&문학

2021-12-15 16:55:24

 

 

영원한 인천 시인 한상억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이록(二綠) 한상억(韓相億, 1915~1992) 시인에 대해 새삼 무슨 말을 더 하랴. 그리운 금강산이 작품 하나로 이미 온 나라, 온 세계가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마당에. 더구나 그는 우리 인천 문단 초창기부터 활약해온 인물이었으며, 이후 인천 문화 예술계를 이끌던 대부가 아니었나.

 

 그러나 일반 시민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아마 누가 이야기를 해 주어야만 비로소 그런가 하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인천이라는 특성 때문이다. 합중시(合衆市) 인천이 안고 있는 서글픈 특징 때문이다.

 

 먼저 인천 문화, 예술계에서의 활동을 살펴보자. 해방 후 그가 제일 먼저 몸담았던 단체는 <시와 산문동인회(散文同人會)>였다. 인천시사의 기록을 살펴보자.

 

 표양문(表良文)이 주도해 19467월에 결성되었으며 동인지 시와 산문(散文)7집까지 발간한 실적이 있다. 민족 문학의 수립을 표방하고 인천 문학의 대표성을 지닌 동인회로 활발한 활동을 펴 나갔다. 오늘날 인천 문단의 뿌리로 평가된다. 참가자는 표양문, 함효영(咸孝英), 최태호(崔台鎬), 한상억, 김차영(金次榮), 강춘길(姜春吉), 최병욱(崔炳旭), 이진송(李秦松) 등이었다.”

 

 이 동인회가 태어나게 된 계기나 그 당시의 분위기 같은 것을 전하는 기록은 없다. 일제의 압제에 눌려 있던 동도(同途) 문학인들이 해방이러는 혼란기에 상호 격려하고 의지하려는 동료 의식 같은 것이 나타난 것이 아닐까. 아무튼 인천에도 정식 문화 단체가 생기게 되고 한상억도 여기에 가담한다.

 

 인천에서의 문화단체 설립은 19458·15광복 이후 비로소 행해졌다. 광복 이전까지는 엄밀한 의미의 문화단체가 설립될 수 없었으며, 그 출현은 1947212일 서울에서 <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가 창립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울에서의 동향과 비슷하게 인천 나름대로도 문화계가 결속하고 예술인이 규합할 필요성을 통감하고 등장한 것이 <인천예술인협회>였다. 이 협회는 194986일 결성되었으며, 문학·미술·음악인들이 주동이 되었다. 여기 모인 멤버들은 문학 분야에 김차영, 이인석(李仁石), 한상억, 미술 분야에는 김학수(金學洙), 우문국(禹文國), 이경성(李慶成), 서예 분야에는 유희강(柳熙綱), 박세림(朴世霖), 장인식(張仁植), 음악 분야의 최성진(崔星鎭) 등이었으며 회장에는 은행가인 김성국(金成國)을 추대했다.” 이 역시 인천시사의 기록이다. 이어 결성된 단체가 <인천문총>이었다. 그는 여기에도 문학인으로서 참가했다.

 

“1950612<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 인천지부(약칭 인천문총)>가 창립됐다. <인천문총> 창립

 

결성에는 문학에 표양문, 이인석을 비롯한 위의 인천예술인협회 소속 인사들이 그대로 주동이 되어 참가했다. 그렇지만 인천문총은 발족한 지 불과 10여 일만에 6·25전쟁이 발발해 그 기능과 활동이 중단되는 비운에 봉착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중앙 문총에서는 비상 시국에 대처하는 전시(戰時) 전위조직으로서 <비상국민선전대>를 조직하고 628일 서울을 재빨리 탈출할 수 있었던 일부 임원과 회원들이 수원에 결집했다. 그리고 시인 김광섭(金珖燮)을 대장(隊長)으로 문총구국대를 편성, 용약 반공(反共) 전선에 투신해 활약했다. 인천에서도 적 치하 3개월을 보내고 애태우며 기다리던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함께 수복이 되자, 그 죽음과 같은 암흑기간 동안 뿔뿔이 분산됐던 인천문총 회원들이 다시 집결했다. 그리해서 중앙 문총을 방문하고 돌아온 이경성에 의해 전시의 전위조직인 <인천문총구국대(仁川文總救國隊)>가 설립하게 됐다. 1023일 시인 조병화(趙炳華)의 집에 모인 표양문, 이경성, 유희강 등 인천 문화계 인사 20여 명이 <인천문총구국대> 발대식을 갖고 대장에 표양문, 부대장에 신태범(愼兌範), 우문국을 선출했다. 이에 따라 인천문총구국대 회관을 당시의 인천일보사(후에 경기매일신문) 2층에 정하고 문화인도 전열(戰列)라는 기치 아래 굳은 결단력을 과시하면서 반공문화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1951년 중공군의 뜻하지 않은 참전으로 국군과 UN군이 일시 후퇴하면서 인천문총 대원들도 남한 각지로 분산해 피난을 떠났다. 그렇게 어렵고 힘든 피난생활을 겪고 나서 19514월 초부터 다시 서서히 복귀해 돌아왔다. 최초로 인천에 돌아온 대원들은 이인석, 한상억, 고봉인(高鳳仁), 최성연(崔聖淵), 장인식, 임진수(林鎭洙), 김양수(金良洙) 등이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인천문총의 재활약이 시작되었다.”

 

 길게 인용한 시사의 내용대로 한상억은 6·25의 발발과 함께 인천문총구국대를 결성하고 여기에 가담한 것이다. 그리고 휴전 협정이 조인되자 피난에서 돌아와 옛 미국공보원 자리에다 다시 구국대 간판을 걸어놓고 장인식, 박세림, 한상억, 고봉인, 최성연 등과 함께 활동을 편 것이다.

 

 그 무렵 인천의 문인들은 지역적인 사정상 그리고 열악한 출판사 사정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서 작품집을 낸다는 일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 때문에 문총구국대가 기념행사 때마다 주로 행하는 시화전(詩畵展)과 문학강연회를 통해 작품 발표의 기회를 갖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시화전이 있을 때마다 출품하는 시인은 이인석, 한상억, 조병화, 최성연, 표양문, 고봉인, 임진수, 김양수, 김차영 등이었다.”

 

 휴전이 되고 1950년대가 지나갈 무렵 인천에서 활동하던 조병화, 정벽봉(鄭僻峰), 이흥우(李興雨), 이인석, 임진수, 윤부현(尹富鉉) 등이 모두 생활 터전을 서울로 옮겨 갔지만 조수일(趙守逸), 한상억, 김양수, 최병구(崔炳九) 등은 그대로 인천에 머물렀다.

 

 “50년대 중반까지 인천에서 활동한 조병화, 이인석 시인들을 인천 시단의 개척기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50년대 중반에서 말기까지 인천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주한 정벽봉, 이흥우, 임진수, 윤부현과 홍윤기(洪潤基), 랑승만(浪承萬) 등을 진취기(進取期)의 시인들이라 하겠다.

 

 이 시기에 김양수, 최성연, 한상억이 중앙 문단에 등단한 일을 들 수 있다. 김양수는 1953문예(文藝)지로 시작해서, 1955현대문학에 평론이 추천 완료되어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 평론 한 길로만 일관했다. 최성연 역시 1955년 동아일보 35주년 기념 문예작품 모집에 시조가 당선되어 등단했고, 한상억은 1956자유문학에 시가 추천되어 등단했다.” 이렇게 인천 문단에서의 활동을 전개한 한상억은 5·16 후 새롭게 구성된 인천예총의 초대 부회장을 맡게 된다.

 

 “5·16 군사정변 뒤, 기존했던 예술문화단체가 모두 해체되고 문화단체의 재구성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중략> 이에 따라 인천에서도 최초로 조직된 문인협회를 위시해 미술·음악·국악·사진 등의 단체 대표가 1962227일 인천문화회관에 모여 창립 총회를 갖고 아래와 같이 임원을 선출했다. 지부장 이종화(李宗和), 부지부장 한상억, 서후덕

 후일 한상억은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 한국문화예술인총연합회 경기도지부장을 역임한다. 더불어 그는 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향토사가, 언론인으로도 널리 이름을 얻는다. 인천상공회의소 90년사, 그리고 1965년 인천시사편찬위원이 되어 고일(高逸), 최정삼(崔定三) 등과 오늘날 인천시사의 밑거름이 된 최초의 시사를 발간했고, 주간인천 주필, 경기일보·경기매일신문 논설위원을 역임하기도 한다.

 

 한상억의 원 고향은 인천 강화. 1935년 인천고등학교의 전신인 인천공립상업학교 졸업했다. 평행선의 대결』 『창변사유같은 시집을 남겼지만 그가 일약 유명해진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그의 작시(作詩) 그리운 금강산때문이었다. 그가 인천을 떠나지 않았고 이 노래는 1961년 한국전쟁 11주년 기념으로 KBS의 청탁을 받아 한상억이 작사하고 같은 강화 출신 작곡가 최영섭(崔永燮)이 작곡한 칸타타 아름다운 내 강산중의 한 곡이다. 곡은 아련한 그리움과 민족의 비원을 애틋하게 표현했으나 절제를 가진 명곡으로 평가받는다. 이 노래비는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뜰에 서 있다. 영원한 인천 시인 한상억. 그의 노래를 불러 본다.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 이천 봉 말은 없어도

 

이제야 자유만인 옷깃 여미며

그 이름 다시 부를 우리 금강산

 

수수만 년 아름다운 산 더럽힌 지 몇몇 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비로봉 그 봉우리 짓밟힌 자리

흰 구름 솔바람도 무심히 가나

 

발 아래 산해 만 리 보이지 마라

우리 다 맺힌 원한 풀릴 때까지

 

수수만 년 아름다운 산 못 가본 지 몇몇 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그리운 금강산한상억 작시 / 최영섭 작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