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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인물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의 삶과 예술

by 형과니 2023. 7. 8.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의 삶과 예술

仁川愛/인천의 인물

2022-04-07 02:15:05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의 삶과 예술 / 송희경(이화여대)

 

 

. 서화미술회와 김은호

 

 

이당 김은호는 1892년 음력 624일 인천의 구읍지인 문학산(구 경기도 부천군) 밑 향교리에서 부친 김기일과 모친 의성 김 씨의 2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문학산 밑에서 터를 닦아 여러 대에 걸쳐 살아왔고, 가을이면 벼 2,300석을 추수하는 부농이었다. 김은호는 공부도 잘하고 붓글씨도 잘 쓰며 그림 그리기도 좋아하는,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한 귀한 아들이었다. 그가 처음 그린 그림은 불화였다고 전해진다. 5세에 문학산 기슭의 사찰에 갔다가 불화를 보고 그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다. 이 상황을 목격한 아버지 김기일은 회초리를 들며 환쟁이는 안 된다고 아들을 꾸짖었다. 이후 김은호는 사당 공부를 그만두고 인천관립일어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그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친척이 아버지 김기일에게 돈 700원을 빌려 팔미도에서 백동사전(白銅私錢)을 만들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그의 아버지가 위조 지폐의 물주로 몰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한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화병으로 세상을 등졌고, 졸지에 가장이 된 소년 김은호는 생계를 위하여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다행히 1908년 인흥학교에서 측량과 단기 과정을 마쳤기 때문에, 경성에 올라와 측량기사 조수 일을 맡을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영풍서관(永豊書館)에서 고서를 베끼는 등,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경성 연지동의 부잣집 땅을 측량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부잣집의 측량 일을 하면서 우연히 사랑채에 펼쳐진 커다란 까치 병풍을 보게 되었다. 병풍에 반한 그는 틈틈이 그림을 엿보며 화가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

 

김은호는 20세가 된 1912, 우리나라 최초의 서화학교인 서화미술회에 입학하였다. 서화미술회는 제실과 조선총독부의 재 정적 후원을 받으며 191261일 설립된 미술 교육기관이다. 이 협회는 발족되기에 앞서 1911322일 두석동에서 시사(詩社)와 동호회 성격인 임시 서화미술원을 열어 윤영기를 비롯한 강진희, 정대유 등을 초창기 교수진으로 초빙하였다.

 

1 년 뒤, 서화미술원은 청년작가를 양성하는 강습소의 기능을 앞 세우며 서화미술회로 개편되어, 새로운 교원을 영입하였다. 제실은 서화미술원에 매달 금 100원을 하사하여 운영을 도왔다. 서화미술회는 화보, 스승의 그림, 고서화, 희귀 도서를 토대로 임모를 수련하는 보수적 교습 방법을 채택하였다. 조선의 전통 양식을 계승하고 도화서 기능을 수행하고자 함이었다.

 

당시 서화미술회는 백목다리, 지금의 조선일보 뒤에 위치하고 있었다. 김은호는 1912년 현채(玄采, 1856-1925)의 소개로 서화미술회에 2기생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그가 1911년 인쇄소의 제판 견습공, 도장포의 각자 견습공으로 일하다가 화가 현채를 만났고, 김은호의 재능을 알아본 현채의 적극적인 소개로 서화미술회에 편입한 것이다. 김은호는 화과 3, 서과 3년의 전 과정을 마치고 우등상을 받으며 1917년 졸업하였다. 당대 최고의 동양화가들에게 그림을 배우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진 것이다.

 

서화미술회 수강생 김은호의 탁월한 솜씨는 여러 경로를 통 해 확인된다. 안중식, 조석진 등의 서화미술회 교수진이 능력 있는 김은호의 어려운 가정 형편을 감안하여 이왕직에서 받은 월급을 모아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사실이나, 송병준(宋秉畯, 1857-1925)의 영적도(影籍圖) 에 수록될 1호 크기의 초상을 그려 30원을 받을 수 있도록 선처한 일화가 그러하다. 또한 김은호는 서화미술회 서과 재학 시절인 1915년 가을, 시정오년(市政五年) 조선물산공진회에서 열린 경성전에 출품하여 입상하였다. 조선물산공진회는 일본의 조선 식민지 통치 5주년을 기념하고자 마련된 박람회이다. 이 행사의 일환으로 국내인과 일본인이 소장한 한국의 고미술품과 전국 미술인들의 출품작을 소개하는 미술 전시도 기획되었다. 고미술품은 일정한 형식의 심사를 통과하였고, 전국 미술인의 출품작은 공모전 형식으로 선발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품작 151점이 경성전과 응지당(唱社堂)에 전시되었고, 그 중 동양화가 98점 포함되었다. 이에 김은호는 젊은 여자가 방 안에서 바느질하는 조선의 가정을 출품하여 ()'를 수상하였다.

 

한편 김은호는 19193.1 독립운동에도 가담하였다. 천도교도인 윤익선이 등사판으로 만든 독립신문 뭉치를 감추고 다니다가 길거리에 뿌리는 일을 한 것이다. 20여일 가량 종로 거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결국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제동 파출소를 끌려갔고, 이후 종로경찰서,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대문 형무소에서 지내던 중 열병을 심하게 앓아 만기 출소 1개월을 앞두고 풀려났다.

 

 

김은호, (순종 어진 초본).1916, 유지에 먹과 색,16×62, 고려대박물관

 

 

 

. . 왕실의 시각물을 제작하다.

 

김은호는 서화미술회 재학 당시믿기 어려운 화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바로 '이태왕', 즉 고종의 어진(, 임금님의 초상화)을 그리게 된 것이다. 원래 고종의 초상화는 일본 화가가 그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고종이 국내 작가를 물색하던 , 평소 친분이 있는 서화미술회 교수가 솜씨 좋은 제자 김은호를 추천한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김의 어진을 차례로 그리게 되었다.

 

그리고 1920년 창덕궁 부벽화 제작에도 가담하였다. 1917년 음력 1110일 오후 5시경, 창덕궁 대조전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방문객의 대기소로 활용된 나인들의 강의실에서 시작된 불은 대조전 일대 전각을 모두 태우고 오후 8시에 진화되었다. 전소된 대조전, 희정당, 경훈각은 1920년 다시 축조되었다.

 

'조선식 건축에 서양식 참조의 원칙으로, 전각은 헐되 목조 부재만 재사용하는 원리를 적용하였다. 건물의 외양이나 중앙 대청 좌우를 온돌방으로 꾸민 점은 전통 방식을 따랐다. 그러나 전기와 수도의 설비, 내부에 커튼 박스와 샹들리에의 부착, 의자와 탁자를 도입한 실내 구조는 서구식 기술과 장식을 도입하였다. 무엇보다도 조선의 왕실 장엄과 다른 점은 부벽화의 제작이었다. 부벽화란 그림을 그려 벽에 붙이는 방식으로, 병풍을 진설하거나 벽면 전체를 치장하는 조선 왕실에서 보기 드문 사례이다.

 

조선총독부는 벽화 제작의 총괄을 김규진(金主, 1868-1933)에게 맡겼다. 김규진은 이왕 즉 순종의 그림 스승이었다. 그리하여 김규진은 순종의 취향을 반영하여 국내에서 활동하는 젊은 동양화가들과 함께 부벽화 6점을 그렸다. 대조전은 오일영, 이용우, 김은호가 담당했다. 김은호는 백학도에서 힘차게 날갯짓하거나 바닷가 근처에서 노닐고 있는 백학과 달을 화려한 채색으로 그렸다. 단정학(丹頂鶴)이 바닷가에 인접한 바위로 하강하는 전형적인 해암군학(海巖群鶴)'의 도상을 수용한 것이다.

 

 

김은호,백학도,비단에채색,214x578,;창덕궁;대조전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김은호는 감옥 생활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른 화가들은 덕수궁 준명전에서 부벽화를 제작한 반면, 김은호는 휴양처로 정한 취운정에서 편안히 약수를 마셔가며 <백학도>를 완성하였다.

 

같은 해 김은호는 <노안도><송학도를 남겼다. <노안도>에는 다음과 같은 화제가 적혀 있다.

 

연꽃이 다 지고 여뀌 꽃 시들며 芙蓉落花殘

강가에는 서풍이 이른 추위를 보내는데, 江上風早寒

묻노라 갈대밭에 사람이 있느냐, 中人在

옛 친구를 찾아 함께 놀려 하노라. 尋舊約與

경신년 국추절 김은호가 삼가 그리다. 庚申秋節, 金殷鎬

 

관서에 따르면 김은호는 이 그림을 경신 국추절( 庚申 菊秋節)', 1920년 음력 9월에 그렸다. 김은호는 보름달이 뜬 가을밤에 기러기가 갈대밭에 내려앉는 풍경을 은은한 채색과 섬세한 붓질로 표현하되, 대부분의 사물에 윤곽선을 생략한 몰골법을 주로 활용하였다. 이는 대부분의 여타 작가가 노안도를 수묵담채로 그린 것과 다른 표현법이다. 게다가 김은호는 갈대 옆에 흰 모란까지 소담하게 그려 넣었다. 이는 화제에 적힌 "서풍의 이른 추위와 맞지 않는 계절 풍경이다. 계절과 어긋한 화목을 그린 이유는 그의 관서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국왕에게 헌상하는 시각물인 만큼 부귀영화의 상징인 모란과 노후의 편안함을 뜻하는 기러기, 갈대를 함께 그린 것이다. <송학도>는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소나무 앞에 학이 우아하게 서 있고 소나무 뒤편에 붉은 해가 떠오르는 풍경을 그린 신자관(亞字款)회화다. 전서체로 적힌 송령학수(松齡鶴壽)’가 알려주듯, 불로장생을 염원하는 길상화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조전 부벽화 백학도)와 마찬가지로 소나무와 학이 함께 등장한다. 이렇듯 김은호가 왕실에 헌상한 회화는 간결하면서도 화사하고 장식적이다. 청년 김은호의 무르익는 필력이 돋보이는 군주의 시각물인 셈이다.

 

. 다양한 화업의 전개

 

김은호는 1922년에 발족된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에 출품하였다. 조선미전은 조선총독부가 주관하여 1944년까지 총 23회에 걸쳐 개최한 국내 최고의 관전이었다. 조선미전은 선발과정에서 서과(書科)와 화과(畵科)를 분리하였고, 서양화의 대칭용어로 동양화를 채택하였다. 서구 미술의 서양화, 중국의 국화, 일본의 '일본화'와 구별하게 위해 지필묵을 뜻하는 그림인 '동양화'를 도입한 것이다. 김은호는 1회 조선미전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꾸준히 입상하였고, 193716회 조선 미전부터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일본 유학을 하고 온 화가들의 집단인 고려미술회의 초청을 받아 후진을 양성하기시작하였다.

 

김은호가 고려미술회의 동양화 지도 교사로 근무할 때, 그에게 우연히 일본 유학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하여 도쿄미술학교 청강생으로 3년간 도쿄에 머물면서 일본 대가들에게 그림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 내의 가장 권위 있는 전시인 제전에 출품하여 연이어 입선을 차지하는 등, 탁월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김은호가 많이 그린 장르는 바로 미인도이다. 김은호는 일본 유학을 통해 독특한 채색 기법을 배워서 신감각의 미인도를 선보이며 조선미전 동양화부의 입상 경향을 주도했다. 유려한 선묘와 화사한 색상을 혼용하여 단아한 전통 여인상을 시각화한 것이다.

 

귀국한 다음인 1928년에는 창덕궁 선원전에 봉안된 순종 어진과 태조, 세조의 어진을 그렸고, 1933년에는 서화협회 간사를맡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재를 털어 개성 부자 박광진의 집(현 한국일보 사옥 옆)을 빌려 조선미술원을 설립하였다. 30대 후반에 이미 화가로서 명성을 굳힌 김은호는 경성의 자택에서 제자를 기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집인 권농동 161번지에 제자들을 불러 모아 숙식을 함께 하며 그림을 가르치는 사숙(私塾)을 열었다. 그의 사숙 이름은 낙청헌()이었다. 뿐만 아니라 낙정헌에서 길러 낸 제자들을 세상에 소개하기 위하여 후소회(後素會)라는 동양화 단체도 발족하였다. 후소회라는 단체명은 위당 정인보가 논어에 수록된 구절인 회사후소(繪事後素, 그림을 그리는 일은 바탕을 마련한 다음이다.)에서 인용하여 지어주었다. 후소회는 지금까지도 매년 정기전을 개최하고 있다. 낙청헌과 후소회를 통해 수많은 제자들이 양성되었고, 그 제자들은 해방 이후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렇듯 동양화단의 스승으로 활약한 김은호는 1937년에 일생 최대의 과오를 저지르게 되었다. '국방헌금 조달과 황군 원호' 들위한 귀족, 관료 부인들의 여성 단제인 애국금차회(愛國金致會)의 일화를 다룬 <금차봉납도(金釵奉納圖)>를 그린 것이다. 그리고 1941'화필보국(畵筆報國), 회화봉공(繪畵奉公)'을 표방한 조선미술가협회에 이영일(李英一, 1903-1984) 등과 함께 일본화부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행보 때문에 그의 이름은 지금까지도 친일화가의 명단에 수록되어 있다.

 

김은호는 해방 이후에는 초상화 제작자로서 다시 그 명성을 회복하였다. 민족기록화 작업과 표준 영정 제작이 한창 진행되는 상황에서, 김은호가 춘향상, 논개상, 신사임당상>을 담당한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미술진람회(이하 국전)의 운영위원으로 참여하였고, 수도여자사범대학 명예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71년 신문회관에서 열린 동양화 여섯 분 전람회)에 초대되어 육대가의 반열에 오르며 동양화단의 큰 스승으로 추앙받았다. 이렇듯 굴곡진 역사 속에서도 화필을 놓지 않았던 그는 197927일 명을 달리 하였다.

 

 

 

참고문헌

 

국립현대미술관 편, 대한제국의 미술, 빛의 길을 꿈꾸다, 국립현대미술관, 2018.

송희경, 以堂 金殷鎬亞字款 회화, 大東漢文學68, 대동한문학회, 2021

以堂 金殷鎬, 書百年, 中央日報東洋放送, 1977.

호암갤러리, 以堂 金殷鎬_인물에서 자연으로, 1892-19791, 호암갤러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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