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시 / 김 동석
인천의문화/인천배경책과영화&문학
2022-05-29 00:03:20
월미도 북단 동쪽 일반해수욕장의 한때(1930년대 초)
해변의 시 / 김 동석
첫여름 한나절 햇빛을 받고 월미도 조탕은 고흐의 그림인 양 명암이 선명했다. 이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소복한 여인과 감색 양복에 노타이셔츠를입은 젊은이가 금빛 모래사장에다 나란히 발자국을 찍으면서 걸어간다. 바다와 하늘은 한빛으로 파랗고.
젊은이는 이따금 허리를 굽혀 손에 맞는 돌을 집어서는 멀리 수평선을 향해서 쏘았다. 감빛 돛, 흰 돛, 보랏빛 섬들이 그의 시야에서 출렁거렸다.
젊은이는 - 사실인즉슨 나지만 - 던진 돌이 물 있는 데까지 가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만족한 미소를 띄우면서 아내더러 말했다.
“당신도 한번 던져보구려.”
아내는 도시락이 든 보자기와 파라솔을 모래 위에 놓더니 돌을 집어서 한때 야구대회에서 신문사 사장이 시구식하듯 팽개쳤다.
“애개, 반도 못 가네.”
우리는 웃으면서 또 걷기 시작했다.그러나 나는 웬일인지 자꾸만 팔매를 쏘고 싶었다. 그래서 모래사장 한가운데다 진을 치고 마음껏 돌팔매질했다. 아내는 어린애처럼 - 아니, 어른처럼? - 보고만 있었다.
그것도 싫증이 나기에 바윗돌 조각으로 오뚝이를 만들어 세워놓고 맞히기로 했다. 힘껏 쏜 돌이 오뚝이의 머리를 맞혀 떨어뜨렸을 때엔 아내도 덩달아 쾌재를 불렀다.
점심은 참 맛이 좋았다. 우리는 도시락을 하나씩만 싸가지고 온 것을 후회했다. 나는 아내로부터 귤을 받아서 하늘 높이 치뜨렸다가 받아서는 까먹었는데 그 맛 또한 황홀토록 찬란했다.
"나는 태양을 먹는다."
아내가 귓결에 흘려보낸 것을 보면 나의 이 말은 그 자리에선 어색하지 않았나보다. 아내도 귤 맛이 꽤 좋았던게지……….
점심을 먹고 있는 동안에 물이 퍽 밀었다. 우리는 노란 귤껍질을 남겨놓고 물가로 내려갔다. 나는 돌을 집어 가벼이 물위에 튀겼다. 돌은 방아깨비같이 톡톡톡 튀어가서 물방울 셋이 나란히 생겼다. 아내는 그것을 신통히 여기는 눈치더니 돌을 집어 나의 흉내를 냈으나 돌은 퐁당 가라앉아 버렸다. 그래도 몇 번인가 거듭한 후 물방울 둘을 튀겼을 때 아내의 얼굴에는 장난스런 아이같은 득의의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내가 수평으로 쏜 납작돌이 물방울 일곱을 튀겼을 때 아내는 아연한 표정이었다. 늘 남자라고 뽐내던 보람을 보여준 것 같아서 나는 속으로 흐뭇한 느낌이었다.
갈매기도 날고, 낚싯배로부터 노래도 들려오고, 하늘과 바다는 여전히 파랗고 건강한 오후다. 하지만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내가 시집살이 저녁밥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월급쟁이의 일요일은 종막을 내리려 한다. 인생사 '아(雅)'가 하나면 속(俗)이 여섯인 것을 모르는 바 아니로되 바다를 두고 돌아가는 우리의 심사는 가히 알조가 아닌가
하긴 우리는 해변에서 로맨틱한 꿈을 탐한 것이 아니다. 제삼자의 눈에는어떻게 비치든 간에 부부 산보만치 싱거운 노릇이 세상에 또 있을까.
물론 나에게도 '이수일과 심순애의 양인' 이 꿈같이 그립던 시대가 있었다. 어리석은 꿈이다. 하지만 누구나 한번은 꾸는 꿈이다. 묘망(沙花)한 바다를 바라볼 때 나의 어린 가슴속에 물결치던 낭만, 나는 소년 시절 갈매기와 백범(白帆)과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망미인혜천일방(望美人兮天一方)
하였던 것이다. 그 '미인(?)' 은 결국 나의 아내가 되어 시방 내 옆에 있지만 먼발치로 볼 때 말이지, 꽃도 따서 쥐고 보면 시들한 것이다. 동경(憧憬)이란, 천일야화(千一夜話)』에 나오는 오색영롱한 생선 같아서 잡으면 재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사실 나는 아내와 거닐면서 소년 시절의 꿈은 깡그리 잊고 있었다. 해변에 나왔댔자 우리는 생활에 시달리는 '월급쟁이 부부' 에 변함 있을 리 없다. 아내에게는 내가 어떻게 보였는지 몰라도 나에게는 아내의 얼굴은 늘보는 아내의 얼굴이었다. 처의 얼굴이 날마다 면도할 때 거울 속에 보이는내 자신의 얼굴과 무엇이 다르랴.
그러기에 나는 아내보다 바다와 놀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바다는 소년 때 바라보던 바다와 다름없는 바다였다. 나와 내가 사는 거리(街)는 나날이 변해가지만 바다는 언제나 영원한 원시적 고동(動)을 지속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어떤 일요일에 처를 데리고 산보 가서야 나는 비로소 생후 처음 바다를 '있는 그대로’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념(邪念) 없이 바라본 순수한 바다, 이야말로 바다의 '시(詩)'가 아니었을까.
(『해변의 시』,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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