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전차, 불 쏘시개로 돌아온 침목
7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서울의 대중교통 수단
[도유진의 ‘그 시절 서울’ 29]
지금은 사라진, 추억의 교통수단이 있다. ‘전차’가 바로 그것이다. 걸어서 국민학교에 다니던 나는 전차를 탈 일이 없었지만, 우연히 한 번 타본 전차에 대한 기억이 유난히 선명하다.
서울의 도로 위를 함께 달리던 버스와 전차
전차 타고 서울 한 바퀴 돌았던 희미한 기억
국민학교 1학년 때였다. 시골에서 서울 나들이 온 큰어머니를 따라 삼선교(지금의 지하철 4호선 한성대역 사거리)에서 전차에 올랐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당시 서울의 동북 방향으로 놓였던 ‘창경원·돈암동선’의 종점이 돈암동이었다. 돈암동 종점에서 출발한 전차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전차 삯은 2원50전이었던 것 같다.
기억 속 처음으로 탄 전차는 삼선교를 출발해 처음 보는 도로를 달렸다. 당시 서울 전차노선도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전차는 을지로를 지나 남대문과 서울역앞을 돌아서 서대문을 거쳐 세종로와 종로를 지나 종로4가에서 방향을 틀어 원남동과 명륜동, 삼선교를 거쳐 돈암동으로 향하는 순환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전차가 남대문을 지나 서울역 앞에서 방향을 바꿔 지금의 염천교 부근을 지날 때쯤 서울역을 떠날 출발 준비를 마치고 증기를 내뿜고 있는 기차가 보였다. 큰어머니는 어린 내게 ‘너를 데리고 함께 시골에 가는 길’이라며 놀렸다. 어려서 혼자 할아버지가 계시는 시골에 떨어져 살았던 나는 그 말이 사실이라 믿었고, ‘엄마,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가겠다, 빨리 내려달라.’며 울먹였던 것 같다. 그날 이후, 내가 전차를 또 탔는지에 대한 기억은 딱히 없다. 내 기억 속에는 그저 그때 전차를 탔던 기억만이 남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전차를 볼 수가 없었다. 전차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적어도 내가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는, 이미 서울에서 전차가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1968년 겨울이 시작될 무렵 전차 운행이 정지되었다. 서울에서 대중교통 전차의 모습이 사라진 것은 전차가 등장한 지 70년 만의 일이었다.
전차의 마지막 운행을 보도한 신문기사(한국일보)와 불쏘시개가 된 침목
서울의 전차, 등장 7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서울에 전차가 등장한 것은 1899년 5월이다. 1887년 1월, 경복궁 건청궁 앞에서 최초로 전등불을 밝힌 고종은 유길준의 서유견문기 초록(1890)과 초대 주미공사(1887~1889) 박정양의 귀국보고서 등을 통해 전차에 대해 알게 되었다. 고종은 1891년 1월 선교사이자 외교관이었던 호러스 알렌에게 전기철도 건설에 대해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한다.
이후 대한제국은 1898년 1월 한성의 전차와 전등사업 운영을 위해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고, 2월에 콜브란과 전차 건설계약 체결, 12월에 동대문발전소를 건설한다. 1899년 5월 서대문~홍릉 간 시운전과 개통식을 거쳐 일반운행을 시작했다. 이후 종로~용산선(1899.12)을 시작으로 확장되기 시작된 전차 노선은 일제강점기인 1943년에 이미 지선을 포함해 16개에 달했다.
광복 이후에도 전차는 서울 대중교통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서울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전차는 늘 만원이었고, 차량과 레일을 비롯한 시설의 노후로 인한 잦은 고장과 느린 속도로 인해 서민의 발이던 전차가 교통의 방해물이라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서울시의 교통난 해소가 시급한 정책 과제로 떠올랐다.
1966년 4월 초, 김현옥 서울시장은 ‘교통난 완화책’을 발효했다. 단기적으로 지하도나 육교, 도로 건설로 수송력을 증대시키고, 중장기적으로는 전차를 폐지하고, 지하철을 건설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美 존슨 대통령 방한이 전차 운영중단 앞당겨
이 발표 직후 서울시는 세종로지하도 건설에 착수하였다. 서울시가 세종로지하도 건설을 서두른 것은 그해 10월 말 당시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완공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공사기간 동안 한국전력이 운영하는 궤도와 전차선을 철거해야 했다. 그러나 한국전력의 협조를 받아내지 못한 서울시는 해결 방안을 모색하다가, 5월 10일 전차 사업의 인수를 발표한다.
6월 1일, 전차 사업이 한국전력에서 서울시로 이관되었다. 그 직후인 1966년 6월10일부터 8월15일까지 세종로지하도 공사로 인해 남대문~효자동, 신문로~화신백화점 구간의 전차 운행이 중단되었다. 이때 세종로~효자동 구간은 궤도와 침목이 아스팔트 아래 묻히게 되면서 전차의 운행이 중지되었다. 당시 아스팔트 밑에 묻혔던 전차 궤도와 침목이 지난봄 광화문 월대 복원공사를 하던 중에 발견되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1967년 9월, 서울시는 ‘전차 현대화 5개년 계획’을 통해 도심지 교통에 지장을 초래하는 노면전차를 폐지하고, 이를 시 외곽 지역의 교통난 해소를 위해 옮겨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설계획은 막대한 비용으로 인해 실현 가능성이 지극히 낮았고, 이는 전차 폐지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서울시는 결국 1968년 전차 운행중단을 결정하였다. 기록에는 1968년 11월 30일 운행을 마지막으로 서울에서 전차가 사라졌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전차의 마지막 운행을 보도한 당시 신문(<한국일보> 1968년 11월 30일 자)은 “電車…70年 만에 막 車”라는 제하의 기사에 ‘사라진 名物…1968年 11月29日 밤 8시12분’ ‘하루 앞당겨 어젯밤 退役’이라는 부제로 마지막 운행된 전차와 그 시간을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기사에 따르면 동대문이 종착지였던 마지막 전차 ‘303호’를 운행한 전차 운전사는 김병철 씨였다.
광화문 월대 자리에서 발견된 전차 궤도와 침목
난로 불쏘시개로 사용된 침목, 알고 보니 발암물질
그렇게 서울에서 전차가 모습을 감추고 난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서울혜화국민학교를 비롯해 서울 시내 공립학교 교정 한쪽에는 전차 침목이 쌓이게 되었다. 서울시 소재 공립학교에 전차 침목이 배급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차 운행 폐지로 인한 궤도와 침목 철거작업으로 서울 시내는 한동안 공사중이었고, 그 과정에서 철거한 침목을 처리해야 했다. 전차 궤도를 받치고 있던 침목에 기름이 먹여져 있으니, 겨울철 난로의 땔감이나 불쏘시개로 제격이었다. 각 학교로 옮겨진 침목은 아저씨들의 도끼질로 작게 부서졌고, 그해 겨울 우리들의 교실에 있던 난로를 지피는 불쏘시개로 그 수명을 다했다.
당시는 겨울이 되어도 늘 난로에 불을 피워주지 않았다. 고학년이 되면서 겨울에 학교 정문을 들어서면서 수위실 창문을 쳐다보곤 했다. 수위실 창문에 빨간색 깃발이 걸리면 그날은 난로에 불을 때는 날이었다. 당시는 바람이 불고 날이 추워도 온도가 영하 3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으면 절대로 난롯불을 피워주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수위실 창문에 빨간 깃발이 꽂힌 날이면 주번은 재빨리 양동이를 들고 창고로 달려가 나무 땔감과 조개탄을 받아왔다. 아저씨들이 반마다 돌면서 종이와 나무를 이용해 조개탄에 불을 붙여주곤 하셨다. 어린 우리는 나무에 불을 붙이는 것도, 조개탄이 벌겋게 달아오르게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전차 침목은 시꺼멓게 기름이 먹여있어서 불쏘시개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쉽게 침목 조각에 불이 붙고, 곧이어 조개탄도 활활 타올라 금세 교실이 따뜻해졌다.
배급받은 조개탄은 난로 속에서 활활 타올라 교실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양동이 속 조개탄이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특공대(?)를 조직해 조개탄 창고에서 아저씨들 몰래 조개탄이나 나무 땔감을 가져오곤 했다. 아마도 남학생들 대부분은 그런 기억이 있으리라. 특공대가 특별히 조개탄이나 땔감을 더 확보한 날이면, 우리반 교실의 온기를 조금이나마 더 길게 지속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른 후 기차 폐침목이 전원주택이나 카페·식당 등의 조경에 재활용되면서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뉴스에서 ‘침목에 사용된 방충·방부제 크레오소트(Creosote, 석탄타르)유는 발암가능물질’이라는 보도를 접했다. 특히 어린이에게는 단순 노출도 위험하다고 하는데, 그 시절 우리는 그것을 한동안 불태우고 연기를 들이마셨는데….
환경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일이었기에 문제 제기 없이 지나간 일이 되었다. 우리 사회 환경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오염되기 전인 그 시절이었기에, 어쩌면 그조차도 우리의 면역력을 높여준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억지 생각해본다.
도유진
서울에서 태어나 지금껏 서울에 사는, 기자 경력을 지닌 작가이다. 어려서 문(門, 사대문) 안에 있는 학교를 다녔고, 부모님 덕분에 47년을 종로구의 오래된 한옥에서 살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이라 굳게 믿으며,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지난 시간을 글로 풀어내어 ‘그 시절’을 공유하고자 한다. 『언어조련사의 변명』 등 다수의 동인지와 『그리운 자작나무』 『어린왕자』(역서), 『도이치 시문학의 이해』(공저), 『4차 산업혁명』 『한양의 물길을 걷다』 등의 책을 펴냈다.
이재욱 기자 ljw@munha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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