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2-16 12:17:29
알찬 문화인천 발전 튼튼한 뿌리로
문화를 일구는 사람들-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인천문화 진흥을 목표로 설립된 새얼문화재단이 올해로 창립 31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수많은 시민들이 재단의 회원이 됐다.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벌여온 일들이 그 세월만큼 더해져 어느새 각각의 자리에서 우뚝 섰다.
그 중심에는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이 있다. 진정한 시민재단으로 바로서기 위해 그 시간동안 전력을 쏟이온 그다.
“문화운동은 적게 시작해서 쌓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뿌리가 깊게 내려지는 것이죠. 오늘의 성과는 우리들만의 공은 아닙니다. 앞선 선배들이 쏟고 다져놓은 토양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문화재단을 이끌어온 그의 철학이다. 한번도 힘들지 않게 일해왔다고 환한 미소를 건네는 모습이 철인을 그대로 닮았다.
“문화운동이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은 뿌리와 토양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스스로가 잘해서 이뤄진다고들 생각하죠. 뿌리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운동을 할 때 잎이 더욱 무성해질 수 있습니다.”
뿌리의식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새얼문화재단이 이룬 일들이 하나하나 바탕이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지역문화발전을 위해 헌신한 인천인을 조명한다는 취지로 지난 91년 ‘새얼문화상’을 제정, 첫 수상자로 우현 고유섭 선생을 선정했다.
이듬해 우현동상을 건립한다. 인천인물 동상 제막사업으로는 첫 테이프를 끊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에 대해 지 이사장이 짚는 시각은 이렇다 “새얼재단이 우현선생을 모셔왔다는 것이 일반의 인식이지만 그 이전에 토대가 있어요. 이경성·김양수씨가 우현 탄생 50주년을 맞아 기념비를 먼저 세웠지요. 이것이 동력이 된 겁니다.”
새얼학생·어머니 백일장으로 넘어간다. 5월마다 이어온 행사가 올해로 21년째다. 참가자만도 7천명에 달하는 전국 최대규모다.
“전국적으로 인정받는 대회 맞아요. 중앙 문인들이 와서 아이들 등도 두드려주곤 하죠. 들여다보면 인천문단에서 현재 활발히 활동하는 중진들이 학생때 이 대회를 거쳐갔어요. 그들이 토양으로 역할을 했기에 오늘에 이른 겁니다.”
지역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전국지 계간 ‘황해문화’도 선배들의 열정이 거름이 됐다고 강조한다.
“지역내 시사문예지 창간을 위해 수많은 이들이 집을 잡혀가면서까지 나섰던 것이 토양입니다. 그 분들의 노력이 밑받침돼 차곡차곡 발전해 갈 수 있었던 거지요.”
수십년 인천의 문화를 이끌어온 이력의 출발점은 노동운동이었다.
학생운동에 앞장선 4.19세대중 유일하게 노동운동을 한 인물이다. 자동차노동조합 경기도지회도 그의 손에 의해 결성됐다.
근로자들을 위한 장학재단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해서 탄생한 것이 ‘새얼장학회’다. 1975년 10월 일이다.
“시민들이 천원도 내고 해서 근로자 자녀를 위한 기구로 출발했어요. 노동청장과 산별노조 조합장과 함께 청와대에 보고차 들어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박 대통령이 노동조합에서도 재단을 만드느냐고 세번을 연거푸 물으시더군요. 시민들이 돈을 내서 만들게 됐다는 이야기를 드렸지요.”
공이 하나 또 있다. 한국노총 장학재단 결성에도 한 몫 했다. 4년뒤 박 대통령과 다시 대독하게 된 그는 한국노총에 장학재단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청원을 한다.
“근로자의 공이 크므로 장학재단을 만들어달라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20억을 내려주라고 지시하시더군요.” 새얼장학회는 8년후 문화재단으로 확대된다. 근로자 복지문제가 개선됨에 따라 재단의 역할이 변해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인천은 주체성도 정체성도 없고 단결이 안된다고 흔히들 이야기해요. 내가 사는 고장을 폄하하는 말이 듣기 싫었어요. 시민들이 함께하는 문화재단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재정은 그야말로 무(無)였다. 시민기금으로 가자는 방향을 세웠다.
계좌당 5천원씩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주위에서는 불가능하다며 극구 말렸다.
“결과는 성공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참해주었어요. ‘이래도 인천이 단결력 없다고 보느냐’ 무언의 외침을 했습니다.” 한푼 두푼 모아준 기금이 현재 50억원에 육박한다. “인천시민이 한 계좌씩 내서 만든 거지요.”
많은 일들을 했다. 문화재단 첫 사업으로 문화예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인다는 취지로 유명 성악가를 초청, ‘가곡과 아리아의 밤’을 시작했다.
이달 20일에 치른 음악회가 어느덧 23회를 맞았다.
그 다음에는 시대의 아침을 여는 열린 만남을 내걸고 ‘새얼아침대화’를 만들었다.
“인천은 정체성이 있으며 단결력도 있다는 것을 실체화하자 생각을 했어요. 재단건물 지하 식당에서 첫 모임 20명으로 출발했습니다. 한번도 거르지 않고 매달 이어왔어요.” 지난 12월 둘째주 수요일 모임이 248회를 찍었다.
청소년 사업에 주목한다. ‘새얼전국 학생·어머니백일장’을 폈는가 하면, 조상의 슬기와 참멋을 찾으려 ‘새얼 역사기행’을 시작했다. 모두 같은 해에 출발한 사업이다.
새로운 일을 계속 만들어 갔다. 전통문화를 잇기 위한 축제 ‘새얼 국악의 밤’을 봄 정기무대로 쌓아갔다. 계간지 ‘황해문화’도 창간했다. 문예창작교실을 열었고 학술심포지엄도 펼쳤다.
“많은 식구들이 생겼어요. 잠시 머물렀던 이들까지 합하면 9천300여명에 달하지요. 시민들의 재단이기에 그 많은 일들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하면 시민의 힘을 받을 수 있습니까’하고 물어와요. 답을 주지. ‘처음엔 적게 하시게, 그러나 알차게 해야하네.’ 그러다보면 1년 2년 3년이 지나면 주시하는 시선이 많아짐을 느끼게 될 겁니다. 드디어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거예요. 문화운동이야말로 적게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쌓이면 점차 큰 뿌리로 뻗어나가게 됩니다.”
모방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모방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공력이 생겨서 성큼 나갈 수 있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조선시대 화원(畵員)들도 똑 같은 그림을 몇백장씩 그렸지요. 차츰 손에 그림이 녹아들어가면 우뚝 선 정선같은 화가가 나오는 거예요. 창조는 신 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모방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시민의 재단임을 다시금 강조한다. “새얼행사에는 VIP좌석이 없습니다. 그동안 ‘가곡과 아리아의 밤’을 앉아서 본적이 없어요. 좌석이 부족해서 회원들이 통로에 앉아 있는데 내가 앉을 수는 없지. ‘새얼아침대화’에서도 인사말이 끝나면 맨 뒤로 가서 앉습니다. 서열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지요. 그러한 정신들을 농축해서 넘겨주고 싶습니다.”
욕심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서 있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 단체는 안된다고 말한다. “회원들과 인천시민이 귀한 이들입니다.”
가장 아끼는 책 두권을 택하라고 하면 공자의 ‘논어’와 사마천의 ‘사기’를 들겠다는 이사장이다.
“생각하건데, 공자가 위대한 것은 세상은 곧으며 옳은 일은 된다는 긍정적인 사고를 가졌다는 점이예요. 당시 혼란이 극성을 부리던 춘추전국이었는데도 말이지요. 공자의 말씀처럼, 내가 한 일들은 좋기때문에 한 것입니다. 스스로 옳은 일이기에 한발한발 열정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거지요. 단 나를 내세워서는 안됩니다.”
2천자에 불과함에도 그 안에 성현의 큰 가르침이 있다고 짚는다.
“인(仁)은 멀리 있지 않다고 했어요. 내가 하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거지요. 후배들이 이런 정신을 가져주었으면 합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다시 시작합시다.”
김경수기자 ks@i-today.co.kr·사진=김성중기자 jung@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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