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터골 학교와 길영희 선생
仁川愛/인천의 인물
웃터골 학교와 길영희 선생
‘웃터골 학교’라고 하면 무슨 말인가 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제물포고등학교를 우정 그렇게 불러 본 것인데,사실 웃터골이라는 곳이 곧 이 학교 교정이다.
자유공원에서 기상대로 돌아가는 이 웅봉산 분지를 옛 인천 시민들은 웃터골이라고 불렀다 시내 어디서 보아도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이 골짜기가 높아보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일 것이다. 1920년에서 35년까지 15년간 웃터골은 인천 공설 운동장으로 쓰였다.
민족 감정을 발산하던 한용단(漢勇團) 야구팀의 선전과 단장 곽상훈(郭尙勳)씨의 일화가 생생히 전한다. 고일(高逸) 선생이 “인천 청년 운동의 발원지는 웃터골이다. 인천 시민에게 민족혼의 씨를 뿌렸고 민주주의의 묘목을 심었으며, 인천의 애국 투사들이 육성된 곳이 바로 웃터골이다”라고 썼는데, 이런 정신을 이어받았던지 후일 이 자리에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등학교가 개교해 인천의 명문으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는다.
인천중학교는 평준화 시책 때문에 없어졌고 지금은 제물포고등학교만 남아 있는데, 이 두 학교가 다 그 유명한 3·1 독립 투사요, 민족 교육자인 길영희(吉瑛羲) 교장 선생에 의해 개교했다. 단순한 개교가 아니라 대한민국 백 년 교육이 나아갈 바, 방향을 제시한 개교이면서 인간 교육의 참 이념을 실현하는 그런 개교였다.
길영희 선생의 웃터골 학교는 교훈을 교실 벽에 써 붙이지 않는 학교였다.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 이 구전(口傳) 문구가 교시이고 강당 편액 속의 ‘유한흥국(流汗興國), 위선최락(爲善最樂)’, 이 글귀가 교훈이었다 더불어 일체의 허식을 버리고 오직 ‘양심에 따른 자율’을 존중하는 것, 이것이 그분이 지향하는 교육의 최종 목표였다
한국 초유의 무감독 시험 제도, 무규율부 제도, 학생 주관 월례 조회 제도, 전교생이 스스로 그룹을 결성하는 그룹 제도, 전문 운동부가 없이 학생 모두가 체육부원이 되는 학교, 교사의 글은 단 한 줄도 학생 교지에 실리지 않는 학교, 한국 중·고교 최초의 대규모 개가식 도서관을 가진 학교….
물론 혹자는 그분의 영재 교육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광복과 6·25를 거치면서 혼란과 황폐 속에 신음하던 이 나라 재건을 위해 가장 시급하고 절실했던 것이 인재 양성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정의와 양심으로 민족을 이끌 영재! 이것이 그분 교육의 이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선생이 계셨다면 오늘의 한국 교육 현실을 뭐라고 하셨을까.
오늘 11월27일로 개교 50주년을 맞는 인천 웃터골 학교.
웃터골 학교는 좋은 목수가 동량(棟樑)을 고르던 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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