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 고유섭
仁川愛/인천의 인물
◆ 미술사의 개척자 우현 고유섭◆
◇ 생 애 ◇
1905년 인천 용동에서 탄생
1927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 미학과 미술사 전공
1932년 초대 개성 박물관장에 취임
(유형 문화재를 대상으로 한국 미술사를 개척)
1944년 한국 미학의 기틀을 확립하고 세상을 떠남
고 유섭은 지금부터 80년 전 인천의 용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남달리 잘한 고 유섭은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인천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서울보성고등 보통학교를 졸업 한 뒤 전국 수재들이 모여드는 경성제국대학 합격했다.
고 유섭의 부모님도 하루 빨리 고등관이 되기를 원하였지만 그는 '한 나라의 민족혼은 그 나라의 문화재에 깃들어 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우리 문화 유산을 나만이라도 돌보자.'라며 법학을 공부하지 않고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했다. 아무도 하지 않는 미학과 미술사를 공부하는 고 유섭은 열심히 학분에 정진했다.
경성제국대학이 서울대학으로 개편되기까지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한 단 한 사람의 한국 사람인 고유섭은 1930년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 미술 연구실에서 조수로 근무했다.
그는 규장각에 쌓여 있는 산더미 같은 책들을 샅샅이 뒤져 미술사 자료를 수집하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탑들을 돌아보며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3년간에 걸친 연구는 헛되지 않아 '미학의 사적 개관' '조선 미술에 관하여' 등의 주옥같은 논문이 발표됐다. 때마침 개성에 박물관이 개설되자, 1933년 초대 박물관장으로 취임했다. 개성박물관장이 된 그는 한국 고대 미술과 고고학을 깊이 파고 들어가 문화재를 조사하고 연구하는 데 모든 정열을 다 바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문화재에 관심이 없었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허술한 틈을 타 일본 도굴꾼들은 값진 우리의 문화재를 몰래 파내어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고유섭은 우리 민족 문화재의 재인식을 호소하는 글을 계속해서 신문과 집지에 실었다.
그는 1933년경부터 불과 10여년 동안에 진단학보를 비롯한 학회지와 신문· 잡지에 150편의 연구 논문, 유적 조사, 또는 답사기, 화가론, 그밖에 민족 문화재 보호를 위한 해설, 시평, 수필 등을 발표했다. 이로써 우리 문화 유산에 대한 존중과 인식이 사회적으로 크게 계몽되고 싹트게 됐다.
고유섭은 평생을 이땅의 고대 미술 문화에 대한 기초 연구에 바쳤다. 그 중 우리 조상의 물족 조형인 유물이나 유적에 대한 최초의 학문적 기틀은 그에 의해서 비로소 이루어졌고, 그의 탑파에 관한 연구는 독보적이었다. 즉, 신라계의 석탑이 목조에서 기원하여 전탑을 거쳐서 제작 되었으므로, 신라계 석탑에는 목조탑과 전조탑의 양식이 공존하고 전탑에는 목조탑의 양식이 남아있는 것이며, 백제계의 석탑은 바로 목조탑을 모방하는 데서부터 출발 하였음을 밝히고 그 근거를 양식의 고찰에서 입증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의 석탑은 그 역사적, 미술사적 위치가 정립되었고, 그가 일찌기 이룩한 업적은 오늘도 우뚝솟아 후학들의 표적이요, 지침이 되고 있다.
그의 업적을 기려 인천의 학계 및 문화계 인사들과 서울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인천시립박물관 앞에 비를 세우고, 그의 외침을 다음과 같이 비문에 새겨 놓았다.
「우리의 미술은 민예적인 것이매 신앙과 생활과 미술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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