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막의 삼정승 영일 정씨 가문
인천의관광/인천의전설
2007-01-03 04:52:59
옛날 옛적에 인천은
동막의 삼정승 영일 정씨 가문
연수구 동춘동 동막의 도곡 부락을 흔히 삼정승 고을이니 큰 대신, 작은 대신 동리니 하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는 아버지가 영의정을 추증 받고 큰아들이 우의정, 작은아들이 좌의정을 지냈다는 삼부자 이야기에서 유래한 마을 이름이다.
인천은 고려 때부터 인천 이씨와 부평 이씨 두 집안이 명문으로 쌍벽을 이루고 있었는데 조선 시대 초기에 들어오면서부터 각지에서 이주해 온 명문 집안들이 자리를 잡게 된다. 그 중 가장 큰 집안이 동춘동 일대에 자리 잡은 영일(迎日) 정씨(鄭氏)이다.
이 가문이 인천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기인 명종, 선조조에 효릉 참봉을 지낸 정제가 이곳에 내려온 뒤부터라고 한다. 그 뒤 이 가문에서는 영조 때 우의정을 지낸 정우량과 그의 동생 정휘량을 비롯해 많은 판서와 정승들이 이어 나오며 삼공(三公) 문중으로 전성기를 누린다.
바로 삼정승 고을이라고 하는 것은 정제의 6대손으로 숙종 때 판돈녕부사를 지낸 정수기의 맏아들 정우량이 영의정, 우량의 아우 휘량이 좌의정에 오른 데 이어 아버지 수기가 후일 영의정을 추증 받은 데서 비롯된 이야기이다. 정우량은 호가 학남으로 경종 3년(1723)에 증광문과에 합격한 후 영조 4년(1728)에는 임금의 교지를 짓고 이를 한글로 번역하여 전국 각 도에 반포한 바 있다.
그 후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선생의 문집을 출판해 내었으며, 대사성을 거쳐 좌승지를 지낼 때에는 공자의 후손인 공종수를 성균관에 두게 하기도 했다고 한다. 영조 25년(1749)에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을 지냈다. 아우 휘량은 영조 9년(1733)에 사마시를 거쳐 영조 13년(1737) 별과 문과에 합격하여 대제학과 판서를 두루 역임한 뒤 평안도 관찰사와 우의정에 올랐으며 이어 좌의정을 지냈다.
그는 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하고 소론파를 멀리할 것을 주장하다가 사직한 뒤 말년을 한직으로 보내기도 했다. 정우량과 아우 휘량은 함께 이름을 떨칠 만큼 문장과 글씨에 능했는데 우량의 글씨는 개성의 계성사비에 남아 있다. 그리고 연수구 연수동에 있는 부친 정수기의 묘에도 우량이 글을 모아 세운 신도비가 있다.
정우량의 시호는 문충으로 둘째 아들 치달이 영조 임금의 아홉 번째 딸인 화완옹주와 혼인을 하여 정우량과 영조 임금은 사돈간이 되었다. 연수구 동춘동 그의 후손 집에는 영조 연간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색채가 선명한 그의 영정(影幀)이 전해져 오고 있어서 제삿날에는 후손들이 이 영정을 모시고 차례를 지낸다고 한다.
이 그림은 조선 시대의 초상화 가운데서도 비교적 수작에 속하는 작품이다. 단청의 색깔처럼 진하고 불투명한 채색 방법으로 무늬에 신경을 써서 사실적으로 표현한 초상화로서 색채는 적, 황, 청 3색과 백, 흑의 5가지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관복을 입은 모습의 약간 측면을 향한 얼굴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정면을 보고 있는 좌우 대칭 구도로서 세밀한 복장 표현이 아주 뚜렷하며 옷의 주름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기법을 구사한 그림이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우량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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