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기격동의현장인천]프롤로그/떠나는 일인들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11 09:06:19
[해방기격동의현장인천]프롤로그/떠나는 일인들
광복 60년이 지난 인천은 여전히 일제의 잔재 문제로 시끄럽다. 인천경제자유구역 송도국제도시의 이름이 된 '송도(松島)'의 지명문제가 지역사회의 새로운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인천항 개항(1883) 이후 '외교 자유지역'이었던 자유공원(만국공원)은 맥아더동상을 둘러싼 보·혁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인천개항은 인천이 우리나라의 관문이자 허파였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일제 치하에서의 인천은 수탈의 전진기지일 수밖에 없었다. 1945년 8월15일 맞은 해방은 인천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남다른 데가 있다.
인천항 개항 이후 일본은 인천을 아주 특별하게 여겼다. 인천은 조선 땅의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세계 열강들도 인천을 통해 우리나라로 진입하려 했다.
1945년 8월부터 1948년 8월까지 3년 동안의 해방기 인천에선 일제 식민지배의 청산, 좌·우 대립 격화 등으로 매우 숨가쁘게 돌아갔다. 가장 강력한 식민도시였던 근대 인천이 현대 인천으로 전환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2005년 8월 인천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겉모습만 변했지 인천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흐름은 매우 긴박하다.
해방기 격동의 현장이었던 인천을 재조명해야 하는 이유다.
과거 월미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제물포 해전(1904)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배꼽에 위치한 인천의 일본 식민지화는 더 일찍 시작됐다. 인천의 입장에서 볼 때 일제 강점기간은 36년이 아니라 62년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개항과 함께 일제는 인천을 철저히 식민지화했던 것이다.
1903년 일본인들이 인천개항 20주년을 기념해 당시 인천에 있던 출판사 '조선신보사'에서 간행한 인천지역 종합지 '인천번창기(仁川繁昌記)'는 이 같은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직 우리 학계에 보고된 적이 없는 '인천번창기'의 표지그림은 일본인들이 일본과 인천과의 관계를 미국과 하와이와의 그것처럼 여기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설명해 준다. 태극기와 일장기를 X자형으로 포개 '공존번영'을 상징화하고 있으며, 인천항 일대의 번화한 모습도 생생하다. '인천의 번창이 곧 일본의 번창'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최근 이 책을 일본에서 구입한 김창수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은 “한 지방의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서술자들이 해당 지방의 주역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일본인들은 러일전쟁(1904)과 을사늑약(1905) 이전에 이미 인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지배적 위치를 확보한 지배자의 위치에서 '인천번창기'란 이름의 인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사실은 일본 패망직후 인천거주 일본인들의 본국철수를 주도했던 인천 일본인상조회의 회장을 맡았던 고타니 마스지로의 회상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인천에서의 일본인 철수 모습을 생생히 기록한 '인천인양지'란 책에서 인천 개항 8년이 지난 뒤 일본의 대표적 신사에서 신체(神體)를 가져 와 인천거주 일본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끔찍이 여겼던 신사를 우리는 너그럽게 대했다. 해방 뒤 인천시 관료들은 인천신사의 상여를 인천시민들의 상여로 삼도록 할 정도로 일제에 대해 관대했던 것이다.
올 해로 창간 45주년을 맞는 경인일보는 광복60주년과 창간을 기념해 개항 이후 인천의 모습과 해방기 인천의 역동적인 순간순간을 이번 기획시리즈를 통해 생동감있게 되살린다는 구상이다. 이번 기획특집에는 이갑영 인천대 교수, 이현주 국가보훈처 연구관, 김창수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등 3명의 전문가가 함께 한다.
/ 정진오·schild@kyeongin.com
[해방기격동의현장인천] 8·15이후 떠나는 일본인들
'잘있거라 인천아. 이별한 후에도 탈없이 피어나렴 벚꽃아/머나먼 고향에서 쓸쓸한 밤이면 꿈속에서 울리겠지 월미도야//기차는 떠나가고 항구는 희미하다. 이제 이별의 눈물로 외치나니/뜨거운 인사를 받아주오. 그대여 고마왔어요. 안녕!'
인천에 대한 진한 사랑과 이별의 마음을 담고 있는 이 글은 우리나라 시인의 작품이 아니다. 인천에 살던 일본인들이 해방직후 인천항을 떠나면서 읊은 '잘있거라 인천아!'란 제목의 노래가사다.
8·15 이후 인천 거주 일본인들의 자치단체였던 인천 일본인세화회(日本人世話會)의 회장을 맡아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철수하는 사업을 주도했던 고타니 마스지로(小谷益次郞)가 인천에서의 일본인 철수과정을 담아 1952년 펴낸 '인천인양지'에 등장하는 이 노래구절은 일제치하에서의 인천을 상징적으로 대변해 준다. 인천을 발판으로 삼아 조선인들의 고혈을 쥐어짜고 산 지배자가 패퇴하면서 남긴 노랫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통곡하며 떠나면서도 인천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보여 주고 있다. 인천에서 산 삶이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웠는 지가 한 눈에 드러난다.
8·15 이전까지 인천에 거주한 일본인은 2만38명이었다고 한다. 이 중 대부분이 패망과 함께 본국으로 떠났지만 1천326명의 일본인은 패망 4개월이 지난 연말까지도 여전히 당당하게 생활했단다. 오히려 미군의 도움을 받아 인천의 주인으로 행세하려 하기도 했다. 패망과 함께 조선인들의 테러를 가장 우려했던 일본인들은 그것이 기우였음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인천에 진주한 미군은 일본경찰 등 관리들의 도움을 받아 행정을 펼쳐 나갔다. 이 때부터 일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본국으로 빼돌리려 했고, 중요 공공시설을 파괴하기도 했다.
해방 당일 부평지역에 있던 거대 군수공장의 모습을 생생히 그린 이규원의 단편소설 '해방공장'은 8·15 직후에도 일본의 '산업기지 인천'에선 여전히 해방이 실감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해방 후)사흘되던 날 몇몇 사람이 게양탑 꼭대기에 태극기를 달았더니 헌병들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어 숙직원 한 사람은 벌거벗은 채 도망쳤다. 밤 사이 '조선독립만세'라고 커다란 액판을 써서 문앞에 붙인 것을 보고 헌병은 두 눈에 불꽃을 반사하면서 도끼로 찍어 버렸다…'.
전국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 등지에서까지 쇠붙이를 공출해 이 곳으로 모은 뒤 차량이며, 포탄이며 각종 군수물자를 만들던 일제의 상징장소가 해방 사흘이 지나도록 일제의 창칼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주인공 김용갑이 '해방공장'의 동료 노동자들에게 외치는 절규는 더욱 간절하다. “여러분! 이 강도 회사 중역들은 아직도 반성할 줄 모르고 우리를 착취해서 저축했던 막대한 금액을 몰래 일본으로 돌려 빼는 모양입니다”라면서 공장의 자금을 환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해방직후의 우리행정기관의 일처리가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허술했으면 공장 근로자들이 직접 나서 일제의 자본반출을 막아내려 했던 것일까.
광복 60년을 맞았지만 여전히 우리사회 곳곳에 숨어 '탈없이 핀 벚꽃'을 왜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지를 '해방기 인천'의 모습은 웅변하고 있다.
/ 정진오·schild@kyeongin.com
해방기(1945-1948) 인천연표
●1945년 8월 25일=인영극장에서 건준 제물포지부 결성(회장·조봉암, 부회장·이승엽 등).
●1945년 9월 8일=일본 경찰, 미군 환영 나온 권평근 등 인천시민에게 발포. 사망 2명, 중경상 14명.
●1945년 9월 11일=미군정 전담 부대 일부 인천 도착.
●1945년 10월 7일=대중일보창간.
●1945년 10월 12일=인천 군정청, 인천을 제물포로 개칭(15일만에 인천시로 다시 개청).
●1945년 11월 15일=인천 최초의 시의회 개최.
●1945년 12월 28일=인천 조선차량주식회사, 우리 손으로 만든 화차 7량을 시운전.
●1946년 1월 1일=인천우편국, 우리말 전보 취급.
●1946년 4월 1일=인천시립박물관 개관.
●1946년 4월 14일=김구, 일반 신도와 내리예배당에서 일요예배를 봄(인천 감옥 투옥 중의 생활을 술회).
●1946년 5월 20일=미군정청, 인천항에 일본으로부터 동포 4천585명이 귀환했음을 발표.
●1946년 5월 23일=38선 월경이 무조건 금지됨(국토분단).
●1946년 12월 11일=인천에 담배 배급제 실시.
●1947년 2월 3일=인천항 동결(연안 항로 운항 중지).
●1948년 5월 14일=북한, 14일 정오부터 대남 송전 중단.
●1948년 6월 25일=인천측후소, 고공 관측 성공(2만5천416m).
●1948년 7월 21일=국립도서관 임해문고(臨海文庫)를 인천 월미도에 개설.
●1948년 8월 15일=미군정 폐지 선언. 정부 수립 축하 인천부민대회 개최(30만 인파 인천공설운동장 집결). 대한민국 정부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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