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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해방기 격동 인천]2. 1945년 광복즈음의 표정

by 형과니 2023. 3. 28.

[해방기 격동 인천]2. 1945년 광복즈음의 표정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11 09:07:59

 

[해방기 격동 인천]2. 1945년 광복즈음의 표정

 

 

 

 19458월의 인천의 표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외국인 거류지인 조계가 설정되는 등 인천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만국공원(현 자유공원) 일대는 일본인들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점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식민지 근대화의 첨병 역할을 수행하던 인천이 맞는 광복은 그만큼 역동적이었다. 또한 일본인들의 본거지나 마찬가지였던 인천에선 815일 직후에도 일본인들의 영향력이 어느 지역보다 크게 미쳤다.

 인천시사(2002)는 광복 당시의 인천지역 사회상을 다루면서 의미있는 글귀를 인용하고 있다.

 

 답동성당 신부방에 그 시간이 되어 가보니 벌써 많은 교우들이 모여 있었다. 12시에 일왕의 담화가 시작되었지만 그곳의 라디오마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여 무슨 이야기인지 아무도 알아듣는 이가 없어서 궁금증만 더해 주었다. '항복이다', '아니다'라고 야단들이었는데, 마침 2시 경에 공습경보가 울리고 대공포 소리가 요란하게 인천상공에 퍼지니 항복론은 쑥 들어가 버렸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저녁 6시쯤 경동거리 애관극장 앞길에서 요란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오기에 집을 뛰쳐나와 그리로 가본 나는 참으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애관극장 앞길을 메운 군중은 수백명이 넘었는데, 이들이 언제 준비하였는지 '조선독립만세'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만세삼창을 외치면서 내동 사거리를 지나 일본인들이 사는 동네로 행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물결 속에서 나는 삼촌이 말했던 태극기를 처음으로 보았다.”(임명방씨의 '인중 시절과 태극기에 대한 기억'이란 글)

 

 짧은 이 글에서 8·15 당일의 인천 모습은 물론 전후의 사회상까지도 살필 수 있다. 상당수 인천시민들은 오후 2시가 넘어서까지도 일본이 항복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중학교에 다니던 식자층인 글쓴이도 오후 6시가 되어서야 독립이 됐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서울 등지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왕의 항복 방송과 함께 독립을 알리는 플래카드와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학생들은 그동안 독립의 상징처럼 돼 있던 태극기를 말로만 들었지, 이 때 처음 봤다는 점이다. 어느 도시보다도 인천의 학교는 철저히 식민화 교육에 충실했다는 것도 엿볼 수 있다.

 

 특히 수많은 군중이 일본인 거류지로 가두행진을 벌임으로써 일본인들이 테러 우려에 밤잠을 설쳤을 것이란 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 인천에선 이런 우려는 기우에 그쳤다.

 

 인천 거주 일본인들의 본국 귀환 과정을 기술한 '인천인양지(仁川引揚誌)' 등 일본인들의 책에 따르면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일본의 패전을 예상치 못했으며, 인천의 일본인들은 '생명과 재산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심리적 공황상태에까지 빠져 들었다. 일본군 연락병이 일본국민의 치안을 끝까지 담당하겠다는 약속을 전달받았지만 일본인들은 곧 무장해제 될 일본군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광복 이틀 뒤 구성된 인천치안자치회도 일본인들을 위한 것이었고, 826일 정식으로 발족한 인천세화회(패전 후 인천거주 일본인들의 자치단체)에도 자위대격인 '보호계'의 기능이 컸다.

 

 또한 당시 일본인들은 인천에 들어올 미군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이 미군 앞에서 어떤 위험에 노출될 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며, 특히 부녀자의 안전에 유의했다. 이 때문에 당시 부윤(시장) 이케다 키요나리(池田淸成)는 그 대비책으로 유곽의 확장과 정비를 권고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일본인들의 불안은 미군 진주와 함께 사라졌다. 안전한 철수를 보장받은 것은 물론 기득권을 유지한 채로 계속 남아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단적인 예가 상륙 미군 환영식장에서의 일본경찰 발포사건이다.

 

 98일 미 육군 선도대가 인천에 상륙했다. 상륙과정에서는 무장한 일본군과 경찰이 경비를 섰다. 상륙 직전인 이날 오후 2시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나온 시민들에게 경찰이 발포한 것이다. 이로 인해 2명이 즉사하고, 여러 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미군정청 판사는 이날 일본경찰의 행위가 정당했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인천거주 일본인들에게 '미군은 적이 아니다'란 잠깐 동안의 희망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인천에서 있었던 이 사건은 '절반의 광복'을 알리는 서막이었던 셈이다.

 

 이후 미군정은 일본경찰의 기능을 정지시켰지만 194511월 들어 새로 짠 인천경찰서장에 일제 때 경기도회 의원을 지낸 김윤복을 앉히는 등 대부분 일제의 앞잡이들을 경찰간부로 기용했다.

 

 미군은 또 일본인들의 모든 재산을 동결하고 그 재산의 매매취득에 관한 권리행사를 일체 금지했지만 일본인들은 순순히 응하지 않고 시설들을 못쓰게 했다. 광복 직후 인천지역 130개 공장 가운데 제대로 가동된 공장은 불과 48(36%)였다고 한다. 공장시설의 파괴와 도난 등이 원인이었던 것이다.

 

 행정체계는 일제 때의 그것을 원용하는 수준이었다고는 하지만 미군정은 일본인들이 마음놓고 활보하도록 그냥 두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인천거주 일본인들은 10월 초까지도 미군이 자신들을 완전히 추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재산동결조치 이후인 1027일과 28일 이틀간 무려 4400여명의 관료·군인 등이 인천을 떠났다. 미군을 배경으로 인천잔류를 희망했던 일본인들의 꿈이 사그러진 것이다. 2개월 정도 되는 짧은 기간 인천에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일본인과, 그들을 배척하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려는 인천인 그리고 점령자 미군간의 숨막히는 긴장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 정진오·schild@kyeongin.com